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지레나 Oct 30. 2023

제가 밥 사는 게 혹시 불편하신가요

점심을 자주 얻어먹는다. 연달아 약속이 잡힌 날이면 며칠 내내 밥값 지출이 0원일 때도 있다. 물론 그만큼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밥을 자주 사는 편이다.


시골에서 내 돈 너 돈 없이 후한 인심 주고받으며 자란 탓일까. 서울에서 지낸 지 10년이 되었지만, 밥 먹고 계산하느라 다 같이 모여 기다리는 순간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다.


답답한 것은 못 참는 성격도 한몫해서 그럴 땐 재빨리 카드 내밀며 "다 같이 계산해 주세요." 하고 상황을 정리하곤 했다. 어차피 밥은 또 같이 먹을 테고, 그때 가서 더치페이하거나 내가 한 번 얻어먹어도 되는 일이니까.


고민 없이 더치페이했던 날도 꽤 있다. 결혼 전 딱 봐도 내 스타일이 아닌 사람이 소개팅에 나왔을 때,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개인사를 점심 내내 늘어놓는 부장이랑 밥 먹을 때, 일 때문에 만났지만 따로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담당자랑 미팅할 때, 얻어먹지 않고 내 몫은 내가 계산했다. 물론 상대방 몫은 상대에게 맡겼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밥값은 관계의 척도였다. 밥값을 내는 것은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다음에 또 보고 싶으니까, "오늘은 제가 샀으니까 다음에 사주세요" 하면서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반대로 더치페이하면 관계마저도 깔끔하게 정리하는 느낌이 든다. "각자 몫 알아서 정리하고 끝냅시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 더치페이가 괜히 서운할 때도 있고 잘 됐다 싶을 때도 있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이었지만, 다른 사람도 같은 생각이라 여겼다. 각자 먹은 금액만큼 각자 계산했을 뿐인데 혼자 관계의 유통기한까지 계산해 버리곤 했다.


밥값에 담긴 같은 마음, 다른 방식


최근 애정하는 동네 친구와 밥을 먹은 후 '밥값 지론'을 펼치며 계산하려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날은 각자 내자던 친구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을 듣던 친구는 "오래 보고 싶기 때문에 더치페이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때 알았다. 같은 마음을 반대로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더 자주 만나고 싶어서 더치페이하는 사람. 그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굳이 '밥정'을 쌓지 않아도 쌓일 정이기에, '다음번에 사주세요' 같은 핑계는 찾지 않아도 되었을 지 모른다. 나 한 번, 너 한 번 돌아가며 밥을 사는 나와의 관계가 더 계산적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만나자고 연락하고 싶은데 지난번 얻어 먹은 기억에 부담스러워 멈칫하지는 않았을까. 더치페이 순간이 불편했던 나처럼, 혹시 내가 밥 사는 게 그들에겐 불편한 상황이 아니었을지 묻고 싶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 우리 더치페이 해요!



23. 10. 24.

이 위원님이 우육탕면을 사주셨다.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었으니 오늘 커피는 제가 쏩니다. (6,800) 조 주임님과의 오후 티타임 즐기기. 어제 사주셨으니 오늘 커피는 제가 쏩니다. (6,500) 한 달째 플레이도우를 사달라고 조르는 셔니. 청소 힘들어서 안 사줬는데, 옜다 기분이다. 오늘 장난감도 내가 쏜다!! (7,860)


< 소비 관찰일지 :  잘 벌기 전에 잘 쓰고 싶어 소비와 욕구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