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해진 아내를 사랑할 수 있나요?

보통 남편의 아내로 사는 법 - 3

by 레이지마마

한 때 날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이민을 고민해 본 적이 있다. 뚱뚱한 사람이 많은 나라에 가면 나 정도의 몸매는 날씬한 편에 속할 테니까.


결혼 전 나의 키는 166 센티미터. 몸무게는 57에서 58킬로그램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이상적인 몸무게는 전지현을 닮은 48에서 51 사이라고 생각했고, 60킬로그램 대가 되면 여자로서의 인생은 끝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로서의 내 삶은 첫 아이를 낳은 후 일단락되었다.


우리 친정 집안은 모이면 먹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다. 주는 대로 먹어야 했던 나는 타고난 식성이 뭔지 알 겨를도 없이 국보다 찌개, 물냉보다 비냉, 구이보다 조림에 익숙한 입맛이 되었다. 뚱뚱한 집안의 가풍을 벗어나 정상체중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늘 다이어트를 해야 했다. 날씬해지고 싶지만 식탐을 버리지 못하는 20대들이 주로 이용하는 다이어트 방식이 있다. 폭식을 한 후 손가락을 넣어 먹은 음식을 토하거나, 무조건 굶거나, 일주일 동안 고기만 먹거나, 일주일 동안 과일만 먹는 등. 오래갈 수 없고 몸을 상하게 하며 요요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무대포식 다이어트.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달고 살던 나에게 임신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먹어도 되는 인생의 유일한 시기가 있다면, 바로 뱃속에 아이를 넣고 있을 때 아닌가. 이 것은 내가 먹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먹고 싶어 해서 먹는 거다. 어차피 아이 낳고 모유 수유하면 다 빠질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입덧도 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다 보니, 어느덧 내 몸무게는 76kg 이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는 우량아였다. 3.8kg. 아이와 함께 태반이 나오고 나니 딱 5kg 이 줄어들었다. 당황스러웠다. 모유수유만으로 15kg을 뺄 수 있을까? 친정엄마는 애 낳자마자 살 뺄 걱정을 하냐고 눈을 흘기며, 돼지족 삶은 물에 미역국을 끓여 냉면 사발에 담아 삼시 세 끼를 들이미셨다. “많이 먹어야 젖이 잘 돌아.”


무거운 몸과 부족한 잠, 거울 속 내 모습에 대한 분노가 삼박자를 이뤄 우울감이 밀려들었다. 만사가 귀찮고, 이유도 없이 불쑥불쑥 짜증이 치밀었다. 그 짜증의 화살은 주로 가장 만만하고, 가장 빌미를 많이 제공하는 남편을 향했다. 왜 다 먹은 김치통을 냉장고에 넣어놨냐. 트림도 안 시키고 아이를 그냥 눕히면 어떻게 하냐.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 할인마트를 두고 왜 자꾸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 오냐 등등.


나는 남편을 냉랭하게 대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기를 낳는 큰 일을 치렀고, 몸도 다 망가졌고, 밤낮으로 젖을 물리느라 잠도 부족하니까. 그 정도는 이해하고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남편도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서운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집에 오면 한 시도 맘 편히 쉴 수 없게 된 남편의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나의 원망스러운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밤낮으로 젖을 물려도 살은 빠지지 않았다. 거울 속의 나는 만 원짜리 박스티를 입고, 머리를 산발한 채, 퉁퉁 부은 얼굴로 울고 있는 아줌마였다. 밝은 빛이 나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이런 여자에게 사랑을 느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아이를 낳고 나서 뚱뚱하고 후줄근 해졌다고 부인을 외면하면 그게 사람이냐!


사실 남편이 내 몸을 보고 뭐라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남편이 내 뚱뚱해진 몸 때문에 냉랭해지고, 자꾸 밖에서 도는 거라고 단정 지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나한테 이럴 수 있냐며 남편을 원망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그 무렵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았다. 멀리 떨어져서 상황을 되돌아보는 지금의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술집을 운영하던 남편. 술과 향락적인 분위기와 그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늘 주변에 있고, 아내는 늘 우울한 얼굴로 잔소리를 퍼붓고, 때마침 자신을 존경의 눈길로 바라봐주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가씨가 옆에 있다면 나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당시의 나는 콤플렉스의 총아, 결혼의 희생자,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털끝만큼도 이해하기 싫었다. 그 인간이 쓰레기인 것 말고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막장드라마를 볼 때마다 나에게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쿨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리라 생각했는데, 실전에 부딪히니 분노를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따귀를 때리고, 소리를 지르고, 이제 다 끝이라고 선언하며 남편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그날의 일은 우리 가족이 뉴질랜드로 이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콤플렉스를 페미니즘으로 승화시킨 나는 우리의 가정사를 국가적 문제로 비약하며, 이 썩어빠진 대한민국에서 살 수가 없다고.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 싱글맘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도 슬그머니 두려웠다. 낯선 땅에서 어린것을 데리고 혼자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는 나와 아이를 안 보겠다고 하면 어쩌지?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남편은 이성을 잃지 않고 제안했다. '정 원한다면 이혼은 해도 좋다. 하지만, 나도 아이와 떨어져 살 수는 없으니 미국은 같이 가겠다.'


그대로 미국으로 갔다면 조금은 더 폼나게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을 텐데, 현실은 늘 한 편의 콩트 같다. 우리의 재산이나 직업상태로는 미국 비자를 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관광비자도 받기 어려웠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 나라가 뉴질랜드다.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나라. 남편은 뉴질랜드에서 목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휘황찬란한 밤문화, 가정 파탄을 유발하는 유혹이 가득한 한국을 떠날 수 있다면 나야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혼을 논의한 지 3주 만에 뉴질랜드에 도착해, 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불법 노동자로 새 삶을 시작했다.


그간의 마음고생 덕분에 살은 절로 빠져 임신 전 몸무게로 돌아갔고 눈빛엔 독기 대신 새 출발을 향한 의지가 싹텄다. 그렇게 나는 뚱뚱한 사람이 많은 나라에서 날씬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살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이루게 된 것이다.


(2편에 이어서)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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