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편의 아내로 사는 법-5
남편은 양말을 안 신는다. 몸에 열이 많아서 양말을 신으면 온 몸이 답답하고 손바닥까지 바싹바싹 마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지낸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선 운동화와 양말을 따로 챙겨 사람을 만나기 직전에 갈아 신고, 만남이 끝나면 차에 돌아와 곧바로 양말을 벗는다. 그렇게 벗어 둔 양말들이 차 안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자동차 문짝 포켓 홀더, 운전석 옆 콘솔박스, 트렁크 안, 대시보드, 차 바닥 등등.
신던 양말을 차 안에서 발견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 그 기분을 피력하면 남편은 나름의 입장을 밝힌다. ‘잠깐 신은 거라 아직 깨끗하니 뒀다가 한 번 더 신으려고 했다는 것’ 이다. 그럼 난 또 할 말이 많아진다. ‘한 번 더 신으려고 하는 양말이 도대체 몇 켤레인가? 신던 양말이나 입던 옷을 벗어 둔 자리에 그대로 두면 그것들이 쌓여 차안이나 집이 어질러지는 것 아닌가. 어질러진 공간은 마음까지 어지럽게 한다. 당신은 이런 것들이 널브러져 있어도 괜찮은 지 모르겠지만, 나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고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앞으로는 바로바로 치워줬으면 좋겠다.’
남편의 짧은 한 마디에 나는 한 바탕 설교를 퍼붓는다. 내용을 떠나서 상대가 하는 말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으면 왠지 억울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상대방이 나를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거나, 속으로 이를 악문 것이 느껴지면 반감은 더욱 거세 진다. 나는 그런 인간관계의 ABC를 모르지 않는다. 동료나 친구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따따부따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남편에겐 자꾸 함부로 대하게 되는 걸까?
사실 남편이 더러운 사람은 아니다. 여기저기 물건을 널어놓기는 하지만 마음먹고 청소를 시작하면 완벽을 기해 집과 차를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놓는다. 다만, 한번 마음을 먹을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언제 그런 마음을 먹을 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나는 큰 맘 먹고 대청소는 하지 않지만,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각자 샤워를 하고 난 후 욕조나 세면대를 한 번씩 닦아주면 늘 깨끗하게 욕실을 쓸 수 있을 텐데. 협조해 주지 않는 가족들이 답답하다. 남편도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일을 해결하는 속도와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눈에 보이는 문제를 바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고, 남편은 느긋하게 지내다가 필이 꽂힐 때 꼼꼼하게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혼자 사는 집이라면 자신의 속도와 방식대로 살면 된다. 뭐든 상대적인 것이니 누가 더 부지런하네, 게으르네, 깨끗하네, 더럽네 평가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집에 먼지 한 톨이 없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그 만큼 청소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며 살고, 빈둥거림의 미학을 즐기며 인생을 좀 더 관대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어수선한 집을 감수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한 공간을 공유할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상대적으로 빠른 사람은 느린 사람을 보면 속이 터지게 마련이고, 느린 사람 입장에선 상대방의 강박적이고 급한 성격이 피곤하게 느껴진다. 내 삶의 방식을 상대방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것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왜 매번 잔소리를 하게 만드는 가. 왜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나? 내가 이 집의 노예인가?’ 이런 원망의 마음이 쌓이고 쌓여, 아무리 성질을 죽이고 조곤조곤 말하려해도 말투에 이를 앙다문 뉘앙스가 실리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나는 남편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신던 양말 관리에 관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간 가장 많이 사용하던 방법이자, 가장 득이 될 것이 없는 방법은 손으로는 내가 치우면서, 입으로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다. “도대체 왜 양말은 자꾸 여기다 벗어 놓는 거야?” 대개의 경우 남편은 한숨을 쉬며 쓱 자리를 피하지만, 내 말투에 짜증이 과하게 섞였거나, 본인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엔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둬!” 그 대목에서 내가 눈치껏 꼬랑지를 내리면 더 이상 언성이 높아지진 않을 것을 안다. 하지만, 나에게도 지켜야 할 명예와 자존심이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기가 뭘 잘했다고 큰 소리인가? 그래, 전쟁이다.
“왜 소리는 질러?”
양말로 시작된 싸움은 서로의 목소리와 말투, 표정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비난은 과거에 있었던 많은 일들을 들추어낸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상처받은 영혼이 되어 차가운 침묵속으로 빠져들고, 죄 없는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는 것이다. 차 문짝에 양말 좀 구겨 넣어 둔 게 뭐 대수라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같은 패턴의 싸움과 반성을 반복하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우리 집 차 문짝에는 동그랗게 말린 남편의 양말이 놓여 있다. 오늘 아침,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기 위해 운전석에 앉았는데 이틀 전에 본 양말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한숨 쉬지 않는다. 내가 대신 집어다 빨래통에 넣지도 않는다. 남편의 속도와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집안이 어질러지면 스트레스 받는 내가 좀 더 치우면 된다. 치우기 싫으면 그냥 모른 척 둔다. 계속 두고 보기 힘들면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오빠, 청소기 한 번만 밀어주면 안 될까?” 기왕이면 기분 좋게 일하라고 하트 이모티콘도 뿅뿅 날려준다.
그렇게 살다 보면 가끔은 뿔테 안경을 쓴 나의 에고가 고개를 쳐들 때도 있다. ‘집안 일은 공동의 몫인데 왜 내가 부탁하는 자의 입장이 되어야 하지?’ 하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억울한 마음을 살살 달랜다. ‘맞아. 맞아.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조금은 비굴하게, 조금은 대충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