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편의 아내로 사는 법 - 6
대여섯 살 무렵의 일이다. 그날 나는 얼굴과 팔에 케첩을 뿌리고 부엌 바닥에 드러누워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억울하게 혼났던 것 같다. 서럽게 울다가 눈을 감고 죽은 척 연기를 했다. 엄마가 이런 내 모습을 발견하면 엄청 후회하겠지? TV에서 본 것처럼 딸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으며 미안하다 할 거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부엌 바닥이 너무 차가웠다. 실컷 운 뒤라 지치고 배도 좀 고팠던 것 같다. 얼굴에 묻힌 케첩을 조금씩 빨아먹다가 쓰윽 일어나 휴지로 여기저기를 닦고 문 밖을 기웃거렸다. 엄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 아이들을 방치해서 키우던 육아 환경 탓일까?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서라도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아이는 나뿐이 아니었다. 친구와 인형 놀이를 할 때 우리는 먼저 죽는 사람이 되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다. 각자 인형을 손에 들고 상상 속의 공간을 누비며 ‘이랬다구, 저랬다구’ 하며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놀이었다. “화장을 하고 친구를 만나러 간다구.” “나도 화장을 했다구. 근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구.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간다구” 이런 식으로 말이다.
친구가 병원에 간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겠는데? 주인공 자리를 뺏길 수 없지! 하며 나는 뜬금없이 내가 들고 있는 인형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내가 친구네 집에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구. 그래서 죽었다구. 깨꼬닥” “아니야. 아직 안 죽었어. 내가 신고해서 구급차를 불렀다구. (구급요원) 제가 살려줄게요. 어서 일어나세요. 네. 이제 살았습니다.” “그런데 살아난 줄 알았는데 다시 숨이 멈췄다구. 깨꼬닥” 대략 이런 식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 죽음은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최대치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 사람들이 나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 살아있을 때 잘해줄 걸 하고 후회하게 만드는 것.
그렇게 단순하고 철없는 욕망은 어른이 되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나 보다. 남편이 왠지 무심하다 느껴지면 나의 빈자리를 느끼게 해 주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흥, 그러신다 이거지? 내가 좀 없어져봐야 소중한 걸 알 텐데. 어디 외국으로 한달살기를 다녀올까? 그런데 애들은 어떻게 하지? 데리고 가면 남편만 좋은 일 시키는 건데. 그럼 혼자 다녀올까? 애들이 너무 눈에 밟히는데. 그냥 아픈 척하고 드러누울까? 집 안 꼴이 엉망이 될 텐데, 그 꼴을 눈으로 보면서 계속 드러누워 있을 수 있을까?
뒷감당에 대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케첩을 뿌리고 죽은 척하던 단순함과 배짱은 사라지고, 이제 걸리는 것이 너무 많은 어른이 됐다. 그래서 나는 이래저래 생각만 하다가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재난 영화나 한 편 같이 보는 것으로 계획을 축소한다. 그렇게 본 영화 중 하나가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가족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더 임파서블’이다. 2004년에 태국에서 있었던 쓰나미를 배경으로 한 꽤 오래된 영화다. 영화가 종반부로 치닫자 감성이 풍부한 남편이 폭풍 같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가족의 소중함을 엄청나게 느끼고 있구나. 그래 남편은 알고 보면 참 여리고 착한 사람이지. 쓰윽 휴지를 건네주니 눈물을 닦으며 그가 말한다. “자꾸 우리 애들 생각이 나서….”
“나는?”
“어?”
“나느…은?”
“어…. 당연히 생각나지”
억지로 받아 낸 대답이지만 어쨌든 대답은 했으니, 남편의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조용히 혼자 상상해본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사람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그가 없다는 건, 축구 시합에서 아들이 골을 넣어도 함께 환호성을 지를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둘째가 재채기를 할 때마다 ‘빨리 코 풀어’ 하고 잔소리를 해 줄 사람이 없을 거고, 아빠의 팔에 암바를 걸어 항복을 요구하는 아들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듣지 못할 것이다. 라디오에서 U2의 One 이 흘러나올 때 목청껏 따라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 없이 보노의 노래만 듣게 될 거고, 오밤 중에 들리는 기타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게 될 일은 더 이상 없겠지만, 밤의 적막감이 너무 커서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질 것 같다. 명절이 되면 윷놀이를 하다가 판을 엎은 아빠를 떠올리며 웃다 울게 될 것이고, 남편이 지어준 길고양이들의 웃긴 이름은 더 이상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할 것 같다. 자다가 척하고 다리를 얹으면 자동으로 발을 주물러주던 따뜻한 손. 몸이 닿지 않아도 느껴지던 온기와 숨소리.
남편이 사라지고 난 후를 상상하며 떠오르는 생각은 그간 그가 쌓아놓은 업적이나 기념비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사소해서 소중한 지 모르던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이다.
참 이상하지. 살아있는 동안에는 상처받았던 일, 섭섭했던 일만 들춰내며 바가지를 긁었는데, 죽고 나서야 소중했던 매 순간들을 깨닫고 떠올리며 그리워하게 되다니.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나? 살아있을 때 매 순간을 감사하고, 죽고 나면 ‘에이, 그놈의 인간. 없어지니 속 시원하다.’ 하고 가차 없이 잊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인간은 왜 있을 때 고마운 줄 모르고, 늘 돌이킬 수 없을 때 후회하는 걸까?
아무튼, 남겨진 자의 고통을 생각하다 보니 주인공의 자리는 남편에게 양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워하는 자의 몫은 아무래도 멘탈이 강한 내가 감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매 순간을 반짝반짝 소중하게 살아야겠다. 그리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감사의 표현을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웃어줘서 고마워. 무거운 짐을 척척 내려줘서 고마워. 발 주물러줘서 고마워. 매일 집에 들어와줘서 고마워. 코 고는 소리도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 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