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영화, 퍼펙트데이즈

by 레이지마마


엄청난 일을 겪고 삶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변화는 찰칵 찰칵 셔터음처럼 짧은 한순간에 미묘하게 일어난다. 한 줄의 문장으로, 누군가의 한 마디 말로, 문득 일어나는 깨달음으로, 좋은 예술 작품을 보았을 때의 알 수 없는 감동으로.


어제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다 우연히 끌려 이 영화를 열었다. 퍼펙트데이즈. 평소 즐겨보지 않던 일본 영화이고, 일본 영화답게 아주 아주 심심한데 이상하게 눈길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왠지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과 친구를 불러 함께 봤다.


60대 남자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의 공공 화장실 청소부다. 매일 아침 일어나 이불을 개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한다. 분무기로 화초에 물을 주고 유니폼으로 갈아 입은 뒤, 집 앞 자판기에서 캔 커피 하나를 빼 마시며 일터로 향한다. 그는 거의 말이 없다. 하지만 언제나 눈은 반짝 반짝하다. 매일 반복되는 풍경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찾는 아이처럼 호기심이 어려있다.


그는 정성을 다해 화장실을 청소한다. 뭘 그렇게까지 하냐는 동료의 핀잔도 들은척 만척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 거울을 대가며 변기 안쪽, 비데 노즐까지 구석구석 손으로 문질러 닦는다. 늘 같은 자리,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와 우유로 점심 식사를 한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는 눈인사를 한다. 하지만 화장실 청소부 유니폼을 입은 60대 남자의 웃음은 오히려 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의 인사에 응답하는 사람은 작은 꼬마, 정신이 온전치 않아보이는 노숙자 뿐이다.


할당 된 구역의 화장실 청소를 마치면 바구니를 들고 동네 목욕탕에 간다. 비누로 몸을 씻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다. 저녁 식사 장소는 지하 식당이다. 늘 같은 음식에 미주와리 (물탄 위스키) 한 잔을 곁들여 마신다. 집에 돌아와 이부자리를 깔고 불빛 아래서 문고판 소설을 읽다가 꾸벅꾸벅 잠든다. 다시 아침이다.


이러한 일상의 반복이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중간 중간 주변 인물들이 등장해 각자의 희로애락을 겪고, 그의 삶에도 여하간의 파동을 주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영화 중간에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약간의 단서가 나오지만, 그마저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감독은 들추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히라야마 씨의 시선과 눈빛을 따라갈 뿐이다.


세상 잔잔한 이 영화에서 굳이 클라이막스를 찾자면, 그림자 밟기 신을 꼽겠다. 암 선고를 받은 남자가 지난 날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자 히라야마씨는 말 없이 캔 맥주를 건넨다. 맥주를 마시던 그들은 가로등 밑으로 가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며 깔깔대고 웃는다.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장면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히라야마의 얼굴. 현재 안에서 환해지던 얼굴에 과거의 환영이 드리우며 그림자가 지다가, 다시 미소가 떠오르다가, 다시 울음을 터뜨릴 듯 하다가, 찡그린 얼굴이 환한 웃음으로 바뀌다가... 그의 얼굴은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장센. 흔들리는 나뭇잎, 그 그림자 사이로 잠시 들어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빛을 묘사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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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가고, 끝까지 크레딧을 지켜본 사람만 볼 수 있는 지점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KOMOREBI


코모레비는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어입니다. 코모레비는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음력 설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주고 받는다. 나에게 새해 복은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고, 이 영화에서 해답을 찾았다.


나에게 다가오는 매 순간의 삶을 저항없이 받아들일 것.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살 것.

매일 단순하게 반복할 것.




2026. 2. 17.

레이지마마 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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