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아침 5시, 시드니 발 아시아나 항공 교민 전세기로 인천 공항에 착륙했다.
출발 시점. 도시 전체가 격리된 서호주를 제외하고 시드니가 있는 뉴사우스 웨일스주와 우리가 살던 퀸즐랜드 주는 확진자가 없어서 교민들끼리 모여있는 비행기에서는 다들 마스크를 착용했을지언정 서로를 경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겠지만, 귀국길에 오르려면 거쳐야 하는 과정이 간단한 것은 아니라서 큰 결단을 실행한 자들만의 홀가분함과 오랜만에 재회를 앞둔 설렘이 느껴졌다. 피곤한 밤 비행임에도 불구하고 기내엔 화기애애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국적기의 볶음 고추장에 취해 크래커에 고추장을 짜 먹기도 하고 (나), 히든싱어 김연자 편을 보며 아모르파티를 흥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아들)
고향 땅을 밟는 설레는 마음은, 공항 터미널에 들어서면서부터 스멀스멀 죄책감 비슷한 것으로 바뀌어갔다. 누가 뭐라고 해서는 아니었다. 입국 절차를 관리하는 공항 관계자들은 모두 친절했다. 물론 '어서 오십쇼. 고객님. 먼 타향에서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고국에 오셨으니 걱정일랑 내려놓으세요. 저희가 안내해드리는 대로 쭈욱 절차를 밟으시면 됩니다."라는 식의 친절은 아니었지만, (아들의 걱정대로) 안 보는데서 살짝 눈을 흘기거나 툴툴대는 투로 이야기하거나,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새벽부터 방호복을 차려입고 일하시려면 신경이 곤두서실 만도 하건만.
터미널에 들어서자마자 호주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공공 와이파이의 물결이 우리를 환영하듯 폭죽처럼 터졌다. 그와 동시에 따뜻한 환영과 격려가 담긴 지인들의 메시지도 속속 도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시대의 해외 입국자로서 방역 일선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고 세금을 축내는 공공의 적이 된 것 같은 자격지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디스트적 기질을 품고 산다고 했던가. 백마디 칭찬보다 한 마디 악플에 귀를 기울이고 괴로워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이다. 해외 입국자 관련 뉴스에 달린 댓글이나 맘카페에서 읽은 몇몇 분들의 푸념이 알게 모르게 나의 뇌 한구석에 생채기를 남겼나 보다. "싫다고 떠났을 때는 언제고, 왜 한국엔 왜 다시 기어 들어오냐. 세금 한 푼 안 내고 살다가, 이제 와서 한국인이라고 의료와 복지 혜택을 누리려는 것이냐."
나도 세금은 똑같이 냈다구요. 여하 간의 사정도 있었고요.....라고 주절주절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요즘처럼 다들 예민한 시기에 코로나 관련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스크가 다크서클을 가릴 정도로 잡아당겨 쓰고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조아리며 공항을 걸었다.
자가격리 앱을 깔고,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기도 지칠 만큼 여러 장의 신고서와 동의서를 작성하는 과정을 통해 평생 외우지 못할 것 같았던 여권번호를 외워버렸다. 내 것뿐만 아니라 아이들 것 까지 외웠다. 역시 무슨 일에든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제주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해외 입국자들을 위해 인천공항과 김포공항 사이를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제공되었다. 김포 공항에 가는 사람은 하필 또 우리뿐이라 번쩍번쩍 광이 나는 13인승 고급 리무진 택시를 단독으로 승차하는 호사를 누렸는데, 놀랍게도 무료였다. 세금을 축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데, 왜 돈을 안 받으시냐고요. 친절한 기사님은 왜 개인 전화기로 핫스팟까지 만들어 와이파이를 제공해 주시냐구요.
김포공항에 도착해 무료 와이파이를 이용해 제주행 항공권을 검색했다. 입국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항공권은 미리 사두지 않았는데 막상 핸드폰으로 사려니 결제 단계에서 자꾸만 뭘 설치하라고 하고, 체크카드는 안된다고 하고, 14,900원이던 항공권이 갑자기 89,000원으로 바뀌는 등 난항이 거듭됐다.
장 시간 비행으로 지쳐있었던 터라 카운터에서 대강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티켓을 사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와글와글 줄을 서 있어서 그것도 눈치가 보였다.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해외 유입자라는 표시로 붙여준 빨간딱지가 우리 세 식구의 어깨에 주홍글씨처럼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해외 입국자가 제 발 저린 법. 가장 한산한 대한항공 카운터로 가서 아이들을 저 구석에 쭈그리고 있으라 하고, 줄 선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려 티켓을 샀다.
방금 전까지 최저가 항공권을 눈이 빠지게 검색하던 나였지만, 돈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제주행 가장 빨리 가는 걸로 주세요.' 했다. 그러나, 친절한 직원의 일인당 99,000원이라는 안내에 지갑을 꺼내던 나의 손은 심장과 함께 얼어붙었다. 방금 티웨이 항공 홈페이지에서 9,900원짜리 티켓을 목격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가격이다. 공인인증서가 깔린 노트북을 바닥에 펼쳐놓고 티켓 구입을 다시 시도해봐야 하나?
'그 다음 비행기는?'하고 물어보려다, 왠지 체면이 안 서 "혹시.... 마일리지로 갈 수 있는지 봐 주실 수 있어요?" 하고 물었다. "네, 세 분 모두 가능하십니다."
아싸. 이거 일이 술술 풀리는 걸. 역시 한국이 최고야.
해외 입국자는 다른 승객들과 거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에 가장 끝 좌석으로 드리겠다고 했다. "그럼요. 당연한 말씀이죠. 태워만 주신다면야"라고 까지는 안 했지만, 넙죽넙죽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티켓을 받아 들었다. 비행기에 타고 보니 정말 맨 끝자리라 등받이가 젖혀지지 않는다. 우리 좌석의 오버헤드빈(짐칸)에는 소화기와 비상탈출 장비가 자리하고 있어 앞 좌석 짐칸에 짐을 올렸다. 짧지만 나름 승무원 경력자인 나로서는 이 자리가 범죄자들을 호송할 때 쓰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거리를 최대한 유지해야 하니, 이 정도 불편은 우리가 감수해야지 했는데 탑승객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더니 결국 우리 바로 앞 좌석까지 사람들이 꽉 찼다.
이분들은 모르겠지? 바로 뒷 좌석에 전체 코로나 확진자 수의 일정 비율을 꾸준히 차지하고 있는 해외 입국자들이 타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빼곡히 사람을 태울 거라면, 기침을 할 경우 비말이 튀는 방향을 감안해 맨 뒤가 아니라 맨 앞자리를 줘야 하는 거 아니야? 특혜를 누리겠다는 게 아니고, 그게 이치에 맞지 않나?라는 생각을 소리 내어 이야기하지는 못 하고, 그저 빨간 스티커가 붙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아이들에게 입도 뻥긋하지 말고, 무조건 자라고 지시한 후 나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덮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주 공항에 착륙하고 좌석벨트 사인이 꺼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앞 다투어 비행기를 나섰다.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일 끝에 나가자는 큰 아들의 지시에, 어차피 제일 끝에 나갈 수밖에 없지 않냐는 작은 아들의 항변을 들으며 기내에 승무원들만 남을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곧 대장정이 끝나고 집에서 14일간 뒹굴 거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발걸음도 느긋해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출입문이 램프에 연결되지 않고, 계단에 닿아있는 것이 아닌가. 계단 밑에는 셔틀버스를 가득 채운 승객들이 '누가 이렇게 꾸물거리는 거야? 어디 가나 이런 사람들이 꼭 있다니까. 얼굴이나 한 번 보자'하는 표정으로 일제히 비행기 출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를 아무리 움츠려봐도 빨강 스티커는 감춰지지 않고, 우리는 몸 둘 바 모르는 죄인의 발걸음으로 허겁지겁 버스에 올랐다. 해외 유입자를 이렇게 한 버스에 태워도 되는 건가? 이렇게 사람이 꽉 차서 사회적 거리는커녕 서로 백허그를 하고 가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어도 되는 건가? 전용버스로 이동하는 특혜를 누리자는 건 절대 아니고, 그게 이치에 맞지 않냐? 는 생각을 또 다시 마음으로 삼키며 나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마스크에 얼굴을 묻었다.
몇몇 눈치 빠른 승객들이 빨간 스티커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는 건 내 자격지심이겠지?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버스가 터미널에 당도했다. 이렇게 가까운데 꼭 꾸역꾸역 다 태웠어야 하나? 다시 한번 뒤 끝 있게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거리다. 문가에 서있던 우리는 정체를 탄로 당하지 않기 위한 스파이의 빠른 걸음으로 가장 먼저 터미널에 들어섰다. 하지만 가장 앞장서서 들어온 탓에, 동승한 탑승자 전원에게 우리의 정체를 알리게되는 당황스런 상황이 펼쳐졌다.
터미널 입구에 자리 잡은 해외 유입자 신고처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나의 등 뒤로 화들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 바로 앞자리에 앉았던 분들과 셔틀버스에서 백허그를 해주셨던 분들... 그들은 제주도를 여행하는 내내 마음 한 켠에 체기가 가시지 않아 전복뚝배기도, 흑돼지 오겹살도 포기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2020년 12월 6일 오전 8시 50분 출발 제주행 대한항공 KE1281편을 이용하신 승객 중 이 글을 보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 가족은 도착 당일 제주 공항 선별 진료소에서 치른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 판정을 받았으며 자가격리 12일 차인 현재까지 정상 체온과 왕성한 식욕을 유지하며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
코로나 검사를 앞서 받아본 경험자들 중 상당수는 면봉이 뇌를 찌른다라던가, 눈물샘을 건드려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라는 둥의 막 제대한 군인 같은 후기를 남긴다. 왕선배의 악습을 뿌리 뽑기는커녕, 대를 물려 자행하는 직속 선배의 마음으로 리얼한 코로나 검사 경험담을 써볼까도 했으나.....
얼마 전, 나쁜 뉴스는 보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자는 다짐을 한 터라 이쯤에서 오늘의 글은 마무리하겠다.
- 리즈 -
* 자가격리 중계는 인스타그램 @lazymama_l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