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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Dec 16. 2020

100여 건의 중고거래를 마치고

귀국 일기

한달 보름 만에 글을 쓴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가장 굵직한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은 3년 6개월간 거주하던 호주 골드코스트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그만 한 곳에 정착하리라 큰 맘 먹고 정성 들여 장만한 가구와 가전, 자동차 두 대, 약 100여 가지의 살림과 개인 물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만만치 않은 심정적 부침을 겪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아무리 싸게 내놓아도 호주 사람들은 일단 흥정을 하고 본다. 1,500불에 구입해 테두리 비닐도 안 뜯은 LG 56인치 스마트 티브이를 590불에 내놨는데, '200불 어때?' 하고 말을 걸어오는 식이다. 배짱 있게 가격을 후려쳤으면 강단이 있어야 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프라이스 이즈 펌 price is firm" 한마디만 하면 잠시 후 못 이기는 척하며 "오케이. 400불 캐시!"하고 멋진 척을 한다. 마치 중고 거래에 현금 말고 다른 결제 수단이 있다는 듯이. 한 번은 어쩌면 내가 모르는 다른 결제 수단이 있는 걸까? 궁금해서 "캐시가 아니면 뭘로 페이 하려고 했는데?" 하고 되물었다. "글쎄... 어차피 캐시로 하긴 해야 하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곰곰이 따져보지도 않고 되는 대로 말을 내뱉는 사람은 전 세계 어디 가나 있다.


그렇게 흥정을 하는 사이 물건은 결단력 있는 누군가에게 팔려 나간다. 녹슨 문고리나 고장 난 뚱뚱이 TV도 버젓이 내놓는 호주인들의 중고 거래처 - 페이스북 마켓 플레이스에서 거의 새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 집 물건들은 점점 인기를 끌어 나중에는 꽤 많은 수의 팔로워를 확보하기도 했다.


물건에 얽힌 짤막한 사연과, 그것이 팔려나간 후 텅 빈 공간을 인스타그램에 중계하며 '빈 공간의 아름다움과 홀가분함'을 설파했지만 내심 마음 한 구석에 미처 빼내지 못 한 먼지 같은 아쉬움이 소복이 쌓여갔다. 적당한 가격을 정하는 것, 팔아야 할 물건과 지인들에게 나눠 줄 물건, 지역 단체에 기부할 물건을 선별하는 과정의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물건에 대한 집착과 놓아주자는 마음. 상반된 두 마음이 수시로 엎치락 뒤치락 갈등을 일으키다 보니 나중엔 그냥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으로 집에 오는 사람마다 붙잡고 필요한 건 다 가져가 달라고 부탁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다 팔고 주고, 버리다 보니 귀국길 이민 가방이 헐렁했다. 아들이 꼭 간직하고 싶다는 축구 유니폼 몇 벌, 트로피와 메달, 겨울 옷 몇 벌씩과 책 세권, 심지어 신발도 각자 한 켤레씩만 남기고 보니 무게가 많이 남아서 가방 안에 다른 가방을 넣어 올 만큼 여유가 있었다.



헐렁한 귀국 짐


앞으로는 물건을 사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대여할 수 있는 것은 대여하고, 중고를 사서 쓰다가 필요 없을 때 파는 식으로 가볍게 살아야겠다. 우리 집은 워낙 이사를 자주 다녀서 평균적인 4인 가족에 비해 물건이 없는 편이었는데도, 정리를 하고 보니 여전히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끼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옷, 책, 그릇처럼 사용하는 시간보다 보관하는 시간이 많은 물건들은 최소한으로 하고, 집을 꾸미고 싶다면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잠시만 들여놓는 걸로.


당분간 뚜렷한 거처도 없을 테니 가볍게 사는 연습을 할 수 있겠군. 생각하며 희망찬 기분으로 귀국을 했다.


그.러.나.


귀국 첫날, 자가격리를 위해 도착한 집에 크리스마트 트리와 장식물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소중한 가족을 위해 남편이 하루 전날 이마트에 가서 장만한 것들이다. 욕실 한 켠엔 온 가족이 1년을 써도 남을 것 같은 엘라스틴 1800ml 덕용 사이즈 샴푸와 증정 사은품이 딸린 10개들이 죽염 잇몸보호 칫솔 세트도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따로 쓰는 샴푸가 있는데...  


한숨과 감사하는 마음이 교차했지만, 8개월 만에 만난 남편에게 부정적 심기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 미리 다 준비해뒀네. 크리스마스 분위기 나네." 하고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함께 한 세월이 긴 부부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과 기류를 귀신같이 감지한다. 남편은 나의 웃음이 뭔가 애매하다는 것을, 칭찬에 소울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트리는 하나 있어야지.

샴푸랑 비누랑 다 버리고 왔을 텐데 당장 쓸 거는 있어야지.


누가 뭐래?


살짝 흥분한 남편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남편의 속마음을 소리 높여 대변해줬다.


"남편들은 참 불쌍해.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고."



애매하게 재회의 기쁨을 나눈,

- 리즈


* 자가격리 중계는 인스타그램 @lazymama_l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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