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또 다른 이름

츠키시마군에게

by Lazy Yoga Club

새해의 초입 어느 날, 너무 해야 할 게 많아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오후였다.

하고 싶은 건 분명한데 이걸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

머리를 굴리기가 무겁고 버거운 날. 나는 그럴 때마다 화면 속 인물들에게 열정을 대여한다.


그날 내가 대여한 열정의 주인공들은 만화 ‘하이큐’의 고등학교 배구 동아리 학생들이다.

‘하이큐’를 모르는 독자에게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164cm의 신장을 가진 200% 노력형 천재 주인공 A군과, 중학교 때부터 전국 유망주로 이미 배구 감독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재능 50%+노력 50% 천재 주인공 B군이 모두를 라이벌 삼아 발전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주인공들의 거침없는 행보는 보기만 해도 기가 빨릴 정도로 매우 뜨겁다.

패배하는 상황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 배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마음가짐과 태도.

떨어진 공을 마음으로 붙잡지 않고 그다음을 위해

‘한 번 더!’를 외치는 집념까지.

한 시간 정도 대회를 지켜보다 보면 그들의 열기에 감탄하다가도, 대회에 참가 한 사람처럼 금세 지쳐버린다.

흥미진진함과 동시에 이제 그만 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할 때쯤 나의 눈을 반짝이게 한 또 다른 배구부원 C군이 등장한다.


고작 부 활동인데 왜 그렇게 까지 하는 거야?’

C군은 배구하기 좋은 신체조건을 타고났다.

자신의 본능과 직감으로만 움직이는 앞의 주인공들과 다르게, 팀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용하게 관철할 수 있는 여유와 상대의 전략을 파악할 수 있는 지능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는 A와 B를 이겨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압도적인 천재라고 지칭하며 수준 외 인물들로 분류해 버린다. 모든 의지를 내려놓은 뒤로는 현재의 실력 이상으로 노력하는 일 마저 포기한다.

C군은 그들이 불편하다. 그들 곁에 있으면 조급해지는 자신이 싫다. 지켜보다 보면 나 역시 뭐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배구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 주인공처럼 열심히 온 마음을 쏟아붓고 싶지는 않다.



요가얼라이언스 국제요가자격 지도자과정 200시간을 취득하러 네팔 포카라에서 한 달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한국인이 아예 없는 낯선 도시에서, 처음 만난 각국의 외국인들과 함께 초등학생보다 못한 영어실력을 붙잡고 하루 종일 요가만 하던 나날이었다


자격증을 받으려면 3개의 Test를 통과해야 했는데 모든 시험을 영어로 진행해야 한다는 소식에

조급하고 초조한 마음을 다스리기가 매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그 상황을 어떻게든 돌파하기 위해 빈 노트에 파파고 번역기를 돌리며

필수 단어들을 짜깁기 하고, 긴 문장은 반으로 쪼개 외우고, 꼭 해야 할 티칭들만 적어본다.

3일 동안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데도 노트를 보지 않으면 벙어리가 돼서 어버버- 하는 내가 얼마나 멍청해 보이던지. 영어권에서 온 친구들을 질투하고 시샘하고 얄미워하던 내 마음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말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침묵은 어떻게 메꾸지? 내가 다음 말을 하지 못해서 누군가 다치면 어쩌지?

30분 보다 일찍 끝나면 어떡하지? 등등… 한 번 커진 불안의 불씨는 시험 전 날까지도 계속되었다.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어느 날, 한국에 있는 친한 선생님에게 지금의 상황을 말하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견을 구했다. 평소에도 요가적 지식을 얻거나, 요가 외 이런저런 얘기들도 주고받는 친구이자 선생님이라서 그 당시의 나는 아무래도 격려와 응원 비슷한 것들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가 하는 말들을 듣더니 꽤나 단호한 어투로 ‘스트레스를 노력으로 바꿔보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건 결국 그것을 잘 해내고 싶은 내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이고, 스트레스라는 불꽃 역시 열정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와 원동력이 되어줄 거라는 풀이와 함께.


정작 그때의 나는 멘탈이 박살나서 그렇게 바꿔도 초딩 수준의 내 영어실력이 갑자기 늘지는 않는다며 신세한탄을 늘어놓았지만, 맘에 들지 않는 그 답변이 틀린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눈물 콧물 다 빼내서 시원하긴 했다.)


어차피 질 거니까. 어차피 나는 저 정도의 실력이 없으니까. 미리 포기해 버리는 C군을 보고 그 당시의 내가 떠오르던 건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C군이 그들을 바라볼 때 느꼈던 불편함과 피로감은 열정에서 나오는 스트레스가 분명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이기고 싶은 마음이 그들을 완전히 외면하지 못하고 눈치를 본다.

그들을 향한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라는 그의 물음은 결국 ‘그렇게까지 하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는 마음이 상대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결과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정’과 ‘스트레스’를 동일한 물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심이 되는 현대사회 안에서 노력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한 번의 시도로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기 어려운 마당에 시도할 수 있는 기회마저 많이 주어지지 않는, 그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열정이라는 이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무엇을 시작하기 위해 많은 준비가 필요한 사람, 행동을 하면 금방 끝낼 수 있는 실행력은 가지고 있지만 그전에 마음속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열정을 품고 있는 셈이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과 욕심.

더 발전된 미래의 내 모습과 현재 모습의 괴리감을 가진채 불안해하고 있다면, 이제 그만 나의 열정을 인정해 주자.


2.43 몸과 기관을 통달하고 불순을 제거하기 때문에 단련해야 한다. -patanjali yoga sutra-


요가 경전에는 수련하기 전 지켜야 하는 보편적 도리와 개인적 도리가 있다. 그것을 야마, 니야마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중 ‘타파스(Tapas)’ 는 열정적 행위와 단련을 뜻하는 단어이다. 자기 자신을 수련하여 정화시키고, 몸과 감각을 예리하게 만드는 모든 행위가 열정인 것이다.


C군은 다른 배구부원들이 걱정할 만큼 자율 연습에 참여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런 모습은 겉으로 보기엔 주인공들보다 열정적이지 않은 형태로 비춰진다.

그러나 모든 열정이 활활 타오르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큰 불꽃은 내 몸과 주변을 태워 전소시켜버리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번아웃증후군이 여기에 속한다.


아주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건, 작은 불씨로도 충분하다. 다만 C군은 그저 몰랐을 뿐이다.

이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이제 우리는 그가 항상 열정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안다. 주인공과 모습이 달라도, 주인공이 될 수 없어도 상관없다.

뜨겁게 타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내 안에도 그들과 같은 열정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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