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24년 9월, 개인레슨을 1년 반 쯤 같이 했을까. 언제까지 남친도 남사친도 아닌 애매한 사이로 내 연애 인생을 낭비할 순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나는 조용히 따져보기 시작했다.
마누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벌어질 문제들을 적어보는거야.
나는 메모장을 켜고 천천히 그가 가진 단점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최대한 이성적인 척하며 감정은 잠시 옆으로 밀어둔채.
우선 가장 큰 걸림돌은 마누의 몸 상태였다.
‘현’이 처음 그를 소개해줄 때 했던 말은 괜한 농담이 아니었다. 마누는 어렸을 적 생긴 트라우마와 우울증, 급격히 약해진 몸 때문에 차를 타고 5분 이상 달리면 심장이 조이면서 뻐근해지는 지병을 갖고있었다.
큰 병원을 들려 심장의학과도, 신경외과도, 내과에서도 별의 별 피검사를 다 해보았지만 간수치만 높을 뿐 서양의학으로는 정확한 병명과 치료법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되려 의사가 마누에게 되물어보았다던 후기만.
"거 참 이상하네. 왜 그럴까요?"
"제가 그걸 알까요?"
...
그나마 스트레스가 높다는 얘길 듣고 정신과 약을 받아 꾸준히 복용하면서 용케 공익 2년을 다 채운 뒤, 울산에 있는 요가학교와 인도까지 힘겹게 다녀왔지만 평생을 약과 함께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약을 끊은 뒤로는 인도의학 아유르베다를 배웠다고한다. 내가 열심히 요가지도자로 성장하는 동안 그는 건강해지는 방법을 찾고있었다. 스스로의 몸을 마루타 삼아 소화력을 방해하는 바타(바람)와 피타(불, 열)를 빼내며 여러 향신료들과 씨름해보았으나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날씨에, 의사도 아닌 일반인이 인도 의학을 매번 알맞게 적용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데이트 반경은 철저히 ‘동네 안’이어야만 했다. 동네가 강남 한복판이라면 또 몰라. 수도권 밖 변두리에서 차로 5분 이내에 갈 수 있는 카페와 맛집은 생각보다 빠르게 바닥이 났다.
심지어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도 없었다. 갈 수 있는 선택지가 계절 메뉴보다 더 제한적인 상황... 다른 커플들이 한다는 맛집 투어도, 호캉스도, 제주도 여행 조차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기차는? 비행기는? 장거리 이동이라면 마누 앞에서 전부 논외되었다. 적어도 마누의 몸이 좋아지기 전까지는. 15분 거리에 사는 내가 늘 마누의 동네로 와야한다는 것도 아쉬웠다.
중요한건 오랫동안 앓고있던 지병이 여전히 개선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그의 이러한 상태를 곁에서 얼마동안이나 지켜볼 수 있을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의 재정 상태도 하나의 단점이었다. 마누는 당연하게도 다른 요가원에 수업을 하러 나가기가 불가능했고, 그 누구보다 좋은 선생님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써먹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었다. 어차피 멀리 나갈수 없어서 돈을 쓸 일도 없긴 한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 친구와 더 큰 미래를 그릴 수 있을지도 걱정 되었다. (김칫국 한사바리)
다시 방향을 바꿔보자.
단점을 적는 대신, 내가 원하는 사람을 적어보기로. 이상형을 명확히 해두면 판단이 쉬워지지 않을까?원하는 걸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되겠지.
내가 바라는 남자친구는 일단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의 속도가 비슷한 사람. 자기 주장만 내세우지 않으며, 논리와 감성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메타인지가 높은 사람.
자격지심이 없는 사람.
나를 언제나 배려해주는 사람. 작은 습관 하나, 말투가 진중하고, 그 말을 건냈을 때 상대방의 마음을 신경 쓸 줄 아는 사람. 마음의 온도가 비슷한 사람.
나의 직업인 요가나 명상, 영성 같은 다소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 것.
“그런걸 믿어?”가 아닌 “그래서 어땠어?”라고 말해주는 사람.
서로에게 완벽한 존재가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계속 성장하는 존재일 것. 각자의 길을 걷게 될 지라도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사람.
거짓말 할 줄 몰라야하고, 좀 싸가지 없어도 되니까 아무 여자에게나 잘해주지 않을 것. 물질보단 언어와 행동으로서 사랑을 표현해줄것. 히드라 처럼 길에 침을 뱉지 않고, 담배는 일절 피우면 안됌. 친구는 너무 많지 않았으면 좋겠어. 술은 적당히 마실 줄 알고, 내가 존경할 점이 있어야되고 자기주도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하고...…엇
나는 꽤 진지하게 목록을 완성해갔다.
그리고 잠시 멈췄다.
…이거, 마누 아니야?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작성한 이상형 목록들을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빠진 단점이 있나.
혹시 내가 그에게 외형적으로 과한 콩깍지 필터가 씌인 건 아닐까? 그치만 내 눈엔 그이의 짤뚱한 다리도, 빠져나온 콧털과 수염도, 센스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옷 스타일도 너무 너무 잘보이는걸.
…
고민이 더 깊어졌다.
아무리 읽어봐도
답안지는 이미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젠장!!!!
마누가 아닌 문장이 없잖아.
이 정도면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