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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호숲 Dec 21. 2020

감방동료

태리야 제발 놀아줘

감방동료


나는 통번역사다.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일한 케이스인데, 대학원 다닐 때 동기와 우스갯소리로 서로를 cellmate(감방동료)라고 불렀다. 모교의 통번역학과 전용 스터디룸 때문이다.


그곳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감방 중 독방 같았다. 두꺼운 방음용 벽과 문은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고, 기분 탓인지 불을 켜도 안은 늘 어두침침했다. 스터디룸 문의 눈높이 위치에 있는 A4 용지보다 작은 창문은 스터디룸 사용 여부를 확인하는 용도일 뿐, 햇빛이나 바깥세상의 따뜻함이 통과하지 못해 감방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서늘하면서도 꿉꿉한 그곳에 있으면 몸에서 곰팡내가 나는 것 같았다. 환기가 안 되는 방 안에서 무거운 공기와 스트레스에 눌려 공부하면 사지에 족쇄를 채운 수감자가 된 느낌도 들었다(소년이 죄를 지으면 소년원에, 대학생이 죄를 지으면 대학원에 간다는 말이 맞는 걸까). 착실한 동기들은 스터디룸 지박령(모범수)이 되어 공부했지만, 나는 엉덩이가 깃털처럼 가벼워 빈번히 탈옥을 감행했다. 얼마 안 가 비루한 내 실력을 참회하며 감방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지만.



가끔 반려동물 분양숍을 지나칠 때면 스터디룸이 떠오른다. 작은 상자에 갇혀 웅크리고 자거나 답답해서 발버둥 치는 동물들을 볼 때마다 스터디룸에서처럼 마음이 갑갑해진다. 나는 가끔 공부하러 자발적으로 스터디룸 가는 걸 감방생활에 빗댈 정도로 힘들었는데, 동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매일 홀로 박스 크기의 공간에서 산다. 얼마나 힘들까. 나라면 하루도 못 버티고 미쳐버릴 것이다.



태리랑 마리는 어떨까? 어쩌면 우리 집이 분양 숍보다 나은 점은 공간이 조금 더 큰 것, 그 정도 아닐까? 태리가 직접 나를 고른 것도, 내 집을 살피며 ‘이 정도면 살 만하겠네. 입양 갈게요.’라고 입양에 합의하고 제 발로 들어온 게 아니다. 모두 내 결정이었다.


태리는 좋든 싫든 내 집에서 살아야 한다.


매일 같은 풍경을 보고 사는 삶이란 어떤 걸까. 나는 겨우 2년 동안 매일 몇 시간을 같은 공간에 붙어있는 것도 힘들었는데….


태리는 우리 집이 괜찮을까?


고타츠 러버


우리 집에는 고타츠가 있었다.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보고 '고타츠 지옥'에서 뒹구는 게 소원이었기에 결혼하자마자 장만한 것이다. 고타츠 위에 따뜻한 녹차를 담은 보온병, 고봉밥이 아닌 고봉 귤 그릇을 놓고 만화책을 보는 밤은 완벽 그 자체였다.


고타츠가 흡족했던 건 나만이 아니었다. 태리는 고타츠에서 먹고, 쉬고, 신나게 놀았다. 그런데 통대를 다니며 얻은 허리디스크가 회사를 다니면서 심해져 좌식을 못 하게 됐다. 고타츠 히터가 노출된 형태라 고양이가 델까 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는데, 나까지 못 쓰게 돼 중고로 팔았다.




놀이터 2.0


고타츠의 추억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오늘도 태리는 장난감과 내외한다. 산책도 오래 했는데…. 놀이 시도한 지 30분쯤 지나 유체 이탈하려는 정신을 부여잡다가 고타츠가 떠올랐다. 고타츠 안에서 곧잘 놀던 귀여운 태리. 너구리 같고 참 귀여웠지. 너무 잘 놀았는데 괜히 팔았나? 아니야. 히터가 노출돼 있어서 너무 무서웠어. 위험한 건 안 돼. 고타츠를 대신할 게 없을까?


소파에 널브러진 하늘색 여름 담요가 눈에 띄었다. 신혼의 패기로 구입했지만 한 번도 안 쓴 담요. 담요로 새 소파 테이블을 덮어 고타츠를 흉내 냈다. 얇은 패브릭이라 고타츠보다는 텐트 같지만. 태리는 냄새를 조심스레 맡더니 쏙 들어가 버렸다. 놀이터 2.0으로 업그레이드!




불행히도 새 텐트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도 잠시나마 태리가 잘 놀았으니 다행이다. 텐트 인기가 식으면 다른 텐트를 만들면 된다. 바야흐로 개최된 별별 텐트 대회. 빈백 소파에 수직 스크래처를 사다리처럼 걸쳐 이불을 덮었다. 식탁의자에 담요를 걸쳤다. 캣타워 플랫폼에 롱패딩을 걸었다. 이런 식으로 태리가 질릴 때쯤 놀이터를 재정비한다.



텐트는 아이들의 놀이욕을 부추기고 안식처 역할도 한다. 새 텐트를 개시하면 앞다퉈 들어가 빵을 굽는다. 텐트 속에서 쉬는 아이들을 볼 때면 한낮에 광합성을 듬뿍한 것처럼 긍정적인 에너지가 솟아오른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지는 게 놀랍다.


새 장난감을 사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천으로 막사를 만들었을 뿐인데 태리 눈이 반짝인다. 태리가 행복하게 뛰노는 모습은 중독성이 있어서 또 보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행복의 선순환.


무한동력이 존재한다면 그건 고양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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