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속도에 대하여

나의 속도 VS 자본주의의 속도

by 두둥실


당신은 어떤 속도로 살고 있습니까?


커지는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의 수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한국에 놀라는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안전함과 최첨단의 사회적 인프라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대중교통의 편리함과 효율성이다. 지하철 역사의 깨끗함과 늘 제시간에 오는 열차들. 버스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정류장은 늘 깨끗하고 곳에 따라 에어컨이 나오고 엉따가 되는 의자가 있으며 와이파이도사용할 수 있다. 거기에다 전광판에는 버스가 언제 오는지가 늘 표시되고 거의 어김없이 그 시간에 맞춰 도착한다. 지하철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교통 체증과 많은 변수가 있음에도 도착 예정 시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건 놀랄만 한 일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거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쁜 측면에서 놀라는 것 또한 있다. 그건 버스 주행이 매우 거칠다는 점이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올리는 유튜브를 종종 보는데 그들은 최대한 좋게 표현해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재미(?)라고 하거나 터프함에 놀라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정도로 말하곤 한다. 물론 우리나라보다 더 터프하고 거칠게 버스를 주행하는 나라는 매우 많다. 흔히 말하는 개발 도상국 혹은 저개발 국가의 낡은 버스들을 보면 이미 그 터프함은 어느 정도 느낌이 오기 마련이다. 외국인들이 놀라는 건 겉으로 보는 깨끗한 느낌과 운전 퀄리티 사이의 괴리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괴리는 어디에서 발생할까?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도착 시간 알림. 그건 편리함과 자본주의의 억압을 동시에 상징한다.버스 기사들이 거칠게 운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이다. 마냥 차선의 흐름에 따라가기엔 정해진 타임 테이블이 너무나 빡빡하다. 제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성과급이나 수당이 감소하고 회사로부터 받는 평가도 낮아진다.

예상 도착시간 보다 늦으면 (비록 매우 소수이긴 하겠지만) 어떤 승객들은 기사에게 짜증을 내거나 회사로 컴플레인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 환경에서 기사들의 노동시간도 굉장히 길다. 급정거와 급출발을 하고 차선을 넘나드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중에서 시간을 매우 잘 지키면서도 최대한 조심스레 운전하는 기사님들도 있다. 그건 그 개인의 직업 정신이나 소명감 혹은 기질의 영향이겠지만 그걸 일반적 기준으로 삼는 건 쉽지 않다. 빡빡한 시스템에 맞추면서 동시에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운행까지 요구하면 그 격차만큼의 압력은 온전히 기사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그들에게 스트레스로 되돌아온다.

스트레스는 다시 자신에게, 가족에게, 마주치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에게 전파 혹은 전가된다. 그게 우리나라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자 동시에 출산율 꼴찌, 자살률 1위의 불명예스러운 현실을 안겨주는 원흉이다.




이러한 모든 기술적 발전은 산업적 시간 체제를 강화했다.

시간이 조직되는 방식을 바꾸었고, 사회적•기술적 분업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자본주의를 공장의 작업 현장이나 광산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의해 규정되는 생산적인 체제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체제로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사회 및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시간이 사용되는 방식을 재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시간 불평등> 가이 스탠딩 - P. 88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긱워크나 디지털 노매드, 프리터 등 다양한 형태의 직업 방식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이 아니라 사회 혹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시간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정해진 시간에 학교에 가고 정해진 수업 시간 동안 앉아 있도록 교육받는다. 교육은 제각각인 인간을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수있게 해준다. 애당초 공공 교육이 확대된 건 노동력 확보를 위해 최소한의 학습 능력을 이식하기 위함이었다. 정말 산골에 혼자 사는 자연인이나 그 비슷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우리는 모두 사회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유일한 논리는 자본주의이다. 현대의 자본주의가 무서운 건 어떠한 대안도 없고 어떤 대항도 무의미하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 슬라보예 지젝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적당한, 혹은 적절한 균형점이라는 게 필요하다.

많은 선진국 서구권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공공기관이나 서비스의 처리속도가 한국에 비하면 매우 느린 편이다. 엄청난 속도를 우리는 자랑으로 삼고 그 나라의 사람들도 한국에 와서 비교해 보며 자국의 시스템을 답답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 빠른 일처리는 대부분 서로가 서로를 재촉하는, 흔히 말하는 ‘사람을 갈아 넣어서’ 이루어낸 시스템이다. 손이 빠르고 일머리가 좋은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 또한 시스템이 요구하는 속도에 맞추느라 모두가 에너지를 쥐어짠 덕분이다. 내가 서비스를 받는 입장일 땐 빨라서 좋지만 내가 제공하는 입장에선 압박이 된다.


서구권 나라에서 처리 속도가 느린 건 시스템 자체의 비효율성도 있지만 각 개인의 속도를 어느 정도 존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 아닌 문제이기도 하다.내 업무 시간이 아닌데도 다른 이들의 불편함을 위해 나서는 건 훌륭한 직업 정신이거나 도덕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반복되면 더 이상 ‘좋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효율과 편의를 위해 개인의 시간은 얼마나 희생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정당할까?

얼만큼이 적당할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과 제공받는 사람 사이에서 서로에게 부담을 덜 주면서 최대한의 효율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균형 지점은 어디일까?

그런 문제는 단순히 버스 시스템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자영업이든 회사의 직원이든 상관없다. 그 속도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마치 엄청난 급류 속에서 어떻게든 빠지지 않으려 미친 듯이 패들을 휘젓고 균형을 잡는 래프팅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마다 타고 나는 삶의 속도는 다르다. 불행히도 사회의 시스템은 제각각의 속도로 살게 두지 않는다.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엄청난 속도에 맞춰 나가는 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속도를 인지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회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그건 곧 스트레스가 되고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서 악영향을 끼친다. 상당수의 사람은 자신의 적당한 속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사회의 속도에 자신을 맡긴다. 그저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효율은 나빠지고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아파온다. 수많은 사람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마음에 응어리를 진 채 살아가는 걸 보고 있다.


단순히 속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 깊고 넓은 문제점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다만 이 ‘사회적 속도’는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생각해 볼 만한 현실적, 철학적 화두라 할 수 있다. 결국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발전을 이룬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갉아먹고 지구를 괴롭히고 있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 이 미친듯한 속도를 더욱 가열차게 끌어올려 기술과 과학으로 뚫고 나갈 것이냐 아니면 엄청난 불편을 감수하고 속도를 줄일 것이냐.


AI와 로봇이 발전하고 더 강력한 에너지원을 찾거나 더 높은 에너지 효율 시스템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때까지 우리 스스로를 닦달하면서 더욱더 번아웃으로 몰아가야 하고 지구의 에너지를 인간의 것으로 치환하며 엄청난 손상을 계속 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특이점을 돌파할 때까지 이 문명과 지구가 버틸지 어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울증이거나 최소 번아웃 (소진 증후군) 혹은 이유를 모른채 마음이 괴로운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직접 만나진 못해도 전해 듣는 이야기도 많다. 각자의 문제는 모두 다르겠지만 그 근원은 어쩌면 다 비슷한 곳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속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그걸 인지하고 아니고의 차이는 크다. 사회적 속도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더 성공하거나 인정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곧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앞에서 미친듯이 달려간다고 그대로 따라가다보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쓰러질 지도 모른다.

‘어떻게’ 따라갈까 고민하기 전에 ‘왜’ 따라가야 할지를 고민하는게 먼저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떠한가? 어떤 속도로 나아가고 싶은가?

어떤 속도가 나에게 맞는 속도인가?

이 미친듯한 속도의 세상에서 얼마만큼

나의 시간을 지켜내고 있는가?

이 세상의 속도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가?

우리는 서로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피로 사회> 한병철 - P.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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