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어서 아름다운.

So What is it about?

by 두둥실



쏘니라는 남자가 있다.

한때 F1에서 챔피언이 될 거라 기대받던 그는 큰 사고로 부상을 입고 꿈에서 멀어진다.

이혼과 개인파산을 겪으며 나이 들어 이제는 낡은 벤에서 사는 신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드라이버’로 살고 있다. 어딘가 자리가 있으면 가서 그 팀에게 우승을 선사해 주고 미련 없이 떠난다.

이제는 50대의 중년이 된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온다. 모터 스포츠의 정점 F1 무대에 다시 오르게 되고 수많은 난관을 마주치며 한 경기 한 경기를 치루어 간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왜 돌아왔냐고. 왜 이걸 하냐고. 그의 대답은 늘 모호하다. 단 한번 마음을 연 여인에게 수줍게 진심을 털어놓을 뿐이다.

이전의 사고로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다. 또 한 번 사고가 나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원하던 결과에 도달하고 그들이 기쁨에 만취해 파티를 즐기는 사이 언제나 그랬듯 다른 달릴곳을 찾아 미련 없이 떠난다.

F1에 비해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멕시코의 어느 사막 레이싱 경기장에 도착한 그에게 누군가 묻는다. 돈은 얼마 주지 못한다고. 쏘니는 이렇게 대답한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It’s not about money!


그의 눈빛에는 어쩐지 영화 <더 레슬러>에서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심장을 가진채 링으로 뛰어드는 랜디 ‘더램’ 의 뒷모습이,

<머니 볼>에서 보스턴의 엄청난 제의를 거절하고 혼자 차 속에서 딸의 노래 ‘The show’를 들으며 흐르는 눈물을 닦는 빌리 빈의 얼굴이 겹쳐진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칭하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주어진 최초이자 최고의 ‘명령‘은 다름 아닌 ’생존’이다. 자연 상태의 모든 생물은 생존이라는 이름 하에 활동한다. 먹이를 구하고 체온을 유지하며 포식자로부터 숨거나 도망가고 가끔씩은 맞서 싸운다. 그 외의 것은 어떤 가치도 없다. 그 생존의 개념을 유전자 단위로 바꾸면 번식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래서 스스로의 생존을 확보하는 만큼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인간의 개념으로 거기에 모성 같은 어떤 감정을 덧입히기도 하지만 사실은 ‘생존‘이라는 명령 아래 존재하는 또 다른 자연의 활동일 뿐이다.


지구상에 수많은 동물이 존재한다. 진화에 따라 그들은 각자의 생존을 위해 환경에 맞춰 최적의 신체와 지능을 가진다. 인간은 그 지능을 최대한 끌어올려 모자란 신체 능력을 보상하고 단체 생활을 하면서 자연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진화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찬란한 문명은 그 진화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칭하고 다른 동물들을 지배한다. 직접적인 지배를 통해 ’가축‘을 소유하기도 하고 왕성한 문명 활동으로 이름도 모를 동물들을 멸종시키거나 몰아내면서 간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인간은 다른 종들에 대해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인간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인간으로 정의하는가?

인간다움의 정의는 철학적, 과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이고 모두가 동의하는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한마디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그 복잡성 자체가 인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하나는 적어도 지구상의 다른 생물들보다 지능이 높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지능을 활용하는 모든 행위가 ‘인간적‘이라 말할 수도 있을까? 그러나 지능이 생존을 위해 진화한 능력의 하나라면, 그것을 생존에만 사용하는 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어쩌면 생존에서 벗어난 활동 (혹은 지능의 활용) 이야말로 인간다움의 핵심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능이 높아질수록 생존과 상관없는 활동이 많아지는 것을 다른 동물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지능이 낮은 동물은 대부분의 시간을 생존에 쓰며 비생존 행동은 거의 없다. 곤충이나 파충류는 먹이 탐색 중 반복 동작을 잠시 보이는 정도다. 중간 지능의 새나 설치류는 짧은 호기심 활동을 하지만 지속 시간은 길지 않다. 반면 돌고래나 영장류는 생존에 필요한 시간이 줄어 여가가 생기며, 수십 분에서 수 시간 동안 놀이와 상징적 행동에 몰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생존과 관련 없는 특정 행동에 할애하는 시간이 지능에 비례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행동의 복잡성에도 차이가 난다. 지능이 낮은 동물은 단순 반복적 행동을 보인다. 예컨대 곤충은 날갯짓을 계속하거나 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 중간 지능의 동물은 호기심 기반의 탐색적 행동을 한다. 까마귀가 빛나는 물체를 모으거나 쥐가 새로운 통로를 이유 없이 조사하는 것이 그 예다. 지능이 높은 동물은 창의적이고 상징적인 행동을 보인다. 돌고래가 거품 고리를 만들어 감상하거나 오랑우탄이 낙엽으로 모자를 흉내 내는 행동들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논리를 이어가다 인간에 이르면 어떻게 될까? 개인과 집단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다른 동물들에 비해 생존과 관련 없는 일에 쏟는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그 복잡성은 비교가 불가할 정도이다. 그야말로 ‘쓸모없는 짓’이야말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칭할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 아닐까 싶은 정도이다.


그러나 착각하기 쉬운 지점이 있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처럼 직접 사냥하거나 채집하면서 생존하지 않는다. 인간은 지능을 통해 ‘소유‘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그 소유물의 편리한 교환을 위해 ’ 돈’이라는 상징물을 창조했다. 그로부터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기고 교환할 수 있는 인간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그것을 우리는 ’ 자본주의‘라 부른다.

(물론 자본주의의 정의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모호한 것을 알지만 일단 넘어가자.)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직접적 생존 투쟁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의 삶이 생존과 그리 멀지 않음은 우리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이미 느끼고 있다. 통장의 돈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회사에 문제가 생겨 월급이 미루어지거나 장사를 하면서 물건을 팔고 후에 받기로 한 돈이 들어오지 않을 때.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분노, 당혹스러움은 자연상태의 동물들이 느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회사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과 AI를 활용하여 자료를 찾아 스프레드시트에 정리하거나 그럴듯한 PPT를 만들어 내는 행위들은 생존이라는 말과 한참 멀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마사이마라에서 톰슨가젤을 향해 질주하는 치타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것은 ‘가치‘가 매겨진다. 엄밀히 말하자면 진정한 ‘가치‘라기보다 ’교환 가치’라 할 수 있다. 그 자본주의는 점점 거대해지고 복잡해져서 우리는 그 외의 다른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어졌다. 인간다움을 상징하는 예술마저도 얼마큼의 ’교환 가치’를 창출하는가로 평가된다. 순수한 즐거움과 보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에 돈이 필요하다. 무슨 수를 써도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생존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치환되거나 확장된 것에 불과하다. 모두가 돈에 매달려 살아간다.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더 절박하게 생존을 위해 투쟁하거나 인간다운 욕망을 발동해 더 많이 가지고 쟁여두기 위해서. 부모의 품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경제 활동에 나서는 이들에게 우리는 사회를 ’정글’에 비유하곤 한다. 그야말로 직관적이면서도 철학적인 표현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존이라는 이름하에 다른 동물들과 함께 묶이는 것에 근본적인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왜일까?

그 차이는 의외의 곳에서 발생한다. 치타는 더 우아한 동작으로 사냥감을 잡았다고 해서 자부심을 느끼거나 다른 치타들에게 잘난 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멋진 PPT를 만들어 월급을 받기 위해 필요한 생존 활동을 함과 동시에 (항상은 아니겠지만) 멋지게 나온 결과물에 뿌듯해하고 내심 인정받고 싶어 한다. 심지어 필요한 정보 전달과 시인성 같은 기본적인 목표 달성 외에 디자인이나 색의 선택 등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 자기만족을 추구하기도 한다. 아무도 몰라줄 때도 있지만 그걸 하는 과정에서의 기쁨, 딱 내 마음에 드는 무언가가 나왔을 때의 충만함. 그런 “쓸모없는” 행동들은 인간의 삶에 꽤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모든 쓸모없는 행동마다 ‘인간다움’을 의식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런 행동들은 매우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어딘가 스스로 자유롭지 않고 무언가에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한 번씩 떠올려보면 꽤나 새로운 기분을 가질 수 있다. 생존에서 벗어나 즐기는 유희는 모든 동물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그걸 자주, 길게 하려면 생존과 분리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지능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오로지 일하고 돈을 벌고 남는 시간에 먹고 잠든다면 다른 동물과 무엇이 다를까?


# 당장의 생존을 해결하고 미래를 떠올리며 더 많은 걸 소유하려는 욕망 또한 인간의 지능에서 발생한 것이긴 하다. 어떤 면에선 그렇게 많이 소유하면 ’쓸모없는 행위‘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도 있으니 충분히 인간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짧게 정리하고 넘어가기엔 복잡한 주제이니 일단 미루어 두자.)#


생존을 넘고, 단순한 유희에서 발생하는 도파민 반응을 넘어 스스로만의 방식과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게 높은 지능을 지닌 인간을 정말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아닐까? 쓸모없는, 다시 말해 교환 가치가 없는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 아무도 이해 못 하지만 온전히 나를 충만하게 해주는 어떤 아름다움.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쏘니에게 남자가 묻는다.

SO WHAT IS IT ABOUT?

그럼 무엇 때문에 하는 건가요?

쏘니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짓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바하의 모래사막을 거침없이 달리는 버기카가 보인다.

버기카 안의 쏘니는 웃고 있다.

달리다 보면 느껴지는 고요함.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자신과 차만 남는 그 순간.

정말 가끔씩만 찾아오는 날아오르는 그 감각을 다시 느끼길 바라면서.


SO,

WHAT IS IT 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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