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목걸이> 속 김주사의 돈에 대한 자세.
메리 린리 테일러의 『호박목걸이: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속 김주사의 말이다. 『호박 목걸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한 회고록으로, 저자가 남편과 함께 경성에 지은 ‘딜쿠샤’라는 집에서의 생활과 조선 사람들과의 교류, 그리고 3·1운동과 같은 격동의 사건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김주사는 작가의 조선 생활을 돕는 통역가이자 조력자라 할 수 있다. 영어에 능한 양반 출신으로 워싱턴에도 파견된 개화파였고 메리 테일러가 조선을 떠난 후에는 독립 운동에 나섰다가 일제에 의해 고초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돈은 쉽게 벌면 좋지만 악착같이 벌만한 가치는 없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묘한 이질감을 준다. ‘악착같이 벌 가치가 없다’는 대목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쉽게 벌면 좋다’는 말에는 왠지 모를 거부감이 스며든다. 그것은 우리가 돈을 단순히 숭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에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이 결코 불법이나 편법으로 손쉽게 얻는 돈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돈을 버는 일이 너무나 고단하고 힘든 과정으로 각인된 탓에, ‘쉽게 번다’는 상상 자체가 우리에게 불편함과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돈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 때문에 인간의 품격까지 팔아넘길 가치는 없다는 것.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 말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돈을 만만히 보는 대신, 돈을 신처럼 모시며 삶의 전부를 저당 잡힌다.
자본주의는 도망칠 수 없는 강물이다. 그 물줄기는 산업혁명에서 시작해 현대의 디지털 문명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흘러왔다.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했고, 수많은 기술과 기적 같은 발전을 낳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맥북, 손끝으로 접속하는 초고속 인터넷망, 필요할 때 즉시 찾아볼 수 있는 정보와 상품들 모두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자본주의로부터 우리가 얻은 물질적 풍요는 세계 각국을 연결하는 물류 시스템과 현대 의료 기술 등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강물이 넉넉히 흐르던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범람과 침식의 피해가 드러나고 있다. 무한 성장이라는 이 강물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다. 자연은 숨 쉴 틈을 잃었고, 인간은 자신조차 소모품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본주의는 발전의 이름으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왔지만, 이제는 그 흐름이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가는지도 모른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얻는 것이 커서 그에 취해 있을 때는 잃는 것을 체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이제 사람들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에 대한 자각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폐해는 단순히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다층적이다. 산업화와 기술 발전이 가져온 물질적 풍요 뒤에는 환경적 파괴가 도사리고 있으며,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바다를 뒤덮은 플라스틱 쓰레기, 매년 기록을 경신하는 폭염과 홍수는 모두 자본의 이름으로 찍힌 영수증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 무한 성장의 논리는 유한한 지구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자연은 숨 쉴 틈을 잃는다.
동시에 자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며,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 세습된 자본은 사람들의 출발선을 갈라놓고, 그 틈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경쟁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휴식마저 스펙으로 포장되고, 인간관계조차 효율과 계산의 잣대 위에서 평가된다. 낮은 출산율, 높은 자살률, 끝없는 우울과 불안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인간을 지켜주지 못하는 체제의 증거다.
게다가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과정에서 창의성과 다양성은 배제되고, 소비와 경쟁이 삶의 중심이 되면서 인간 경험의 풍부함과 사회적 연대감은 점점 희미해진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남긴 그림자는 환경적·사회적·심리적·문화적 영역에 걸쳐 얽히며, 우리의 삶을 다방면으로 잠식한다.
《호박 목걸이》의 김주사는 돈을 만만히 본다. 그 말 속에는 적어도 돈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가치가 아니라는 생각이 스며있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돈을 첫 번째 자리에 고정해 놓았다. 사랑도, 꿈도, 심지어 존엄도 돈이 허락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돈이 곧 삶의 크기와 무게를 재는 저울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돈은 그토록 절대적인가? 돈이 없다면 삶은 곧 무의미한가? 아니면 우리가 돈을 절대시한 탓에 스스로 삶을 그리 좁게 만든 것일까?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거대한 대안이 논의되어 왔다. 공동체 중심의 삶, 노동과 생산을 공유하는 협동조합적 모델, 심지어 전체 사회를 공산주의적 구조로 재편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들은 이미 실패했거나 실현 가능성이 낮고, 기존 사회 시스템과의 충돌로 인해 제한적이다. 도무지 자본주의를 완전히 대체할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조금씩 수정할 방법은 없을까? 시스템적 변화도 있겠지만, 개개인의 마음가짐에서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혁명의 깃발을 드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돈을 두 번째 자리에 두는 것’ 정도일지 모른다. 돈보다 앞서는 무언가—사람, 자연, 존엄, 우정—그 무엇이든 삶을 움직이는 기준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런 말은 너무 순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소심하고 순진한 변화가 균열을 만든다. 속도를 늦추고 욕망을 재조정하는 작은 태도가 자본주의라는 강물에 작은 물돌이를 만들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때로는 “멈추고, 거부하고, 속도를 늦추는 것”이 가장 혁명적 행위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강물이 아무리 거셀지라도, 그 안에 생겨난 작은 소용돌이는 흐름의 균형을 흔들 수 있다.
김주사의 태도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지혜를 건넨다. 돈은 필요하지만, 악착같이 매달릴 만큼의 가치는 없다. 돈을 만만히 볼 수 있는 태도, 바로 그 여유가 자본주의의 속도를 늦추고 인간다운 삶을 지키는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거창한 혁명은 아니더라도, 그 작은 균열이야말로 우리가 남길 수 있는 소심하지만 진실한 반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