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 사회에서 공식적인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모든 이가 평등하다고 선언하고, 누구든 능력과 노력에 따라 자신의 길을 열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늘 그 말과 어긋난 그림자를 드리운다. 학교에 들어서며 아이들은 이미 알게 된다. 어떤 집의 부모는 학원비를 아낌없이 지불할 수 있고, 어떤 집은 생계를 위해 자녀의 방과 후 시간을 희생한다는 사실을. 대학의 졸업장은 문을 여는 열쇠처럼 작동하고,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인장으로 남는다. 사회는 “공식적 계급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언제나 은밀하게 사람들을 줄 세우고,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세워 놓는다.
이렇게 형성된 암묵적 계급의 구조는 일상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큰 충격이 사회를 흔들 때, 그 위계는 마치 지진 뒤 갈라진 땅처럼 본모습을 드러낸다. 12.3 내란에서 시작해 탄핵을 거쳐 그 뒷수습이 이어지는 지금이 바로 그러하다. 정치적 격랑과 혼란의 와중에, 보통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기득권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법조계, 경제계, 종교계 곳곳에서 드러난 은폐된 손길들. 흔히 ‘엘리트’라 불리던 사람들은 사실상 그들만의 폐쇄적 세계를 구축하며,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질서 속에서 살아왔음이 밝혀졌다. 그들은 사회의 책임보다는 자기 이익을, 공동체의 지속보다는 자기 혈통과 권력을 지키는 데 더 열심이었다.
그러나 역사 속 모든 기득권이 단순히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오히려 사회적 책임과 교양을 갖추고, 공동체를 올바르게 이끌려 노력한 경우도 있었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단지 계급 자체가 아니라, 그런 인문적 소양과 연민을 갖춘 엘리트가 드물다는 데 있었다. 권력과 지위를 가진 이들이 바르게 교육되고 사회적 책임을 체득했다면, 계급은 억압의 수단이 아니라 도전과 가능성을 만드는 구조가 될 수도 있었다. 일부 지도층은 실제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신중하게 판단하며, 소통과 균형을 고민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엘리트는 소수였고, 그 결핍이 오늘날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이어졌다.
역사를 조금 더 멀리 바라보면, 계급은 인간 사회에서 늘 당연하게 자리해왔다. 원시의 불가피한 서열, 고대 제국의 귀족과 노예, 중세의 영주와 농노, 근대의 부르주아와 노동자. 시간은 변하고 체제는 교체되었지만, 계급이라는 장치는 형태를 바꾸며 늘 되살아났다. 철학자들은 이 오래된 굴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심했다.
플라톤은 영혼을 금·은·동의 금속으로 비유하며, 인간은 태생적으로 다르다는 신화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의 위계가 자연 질서라 믿었다. 그들의 사상은 계급의 필연성을 정당화하는 오래된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자 다른 목소리가 등장했다.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탄식하며, 계급과 불평등이 본성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장치임을 폭로했다. 그의 말은 단지 이론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내는 현실의 증언이었다. 12.3 내란을 통해 드러난 기득권의 민낯은, 결국 제도의 허상 뒤에서 세대를 거쳐 쌓이고 은폐된 사회적 장치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떠올릴 수 있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운명이 결정되고, 죽는 날까지 그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제도. 한국은 겉으로는 다르다. 우리는 헌법적 평등을 가진 시민이며, 누구나 노력하면 길을 개척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모의 경제적 자본과 학벌, 사회적 네트워크는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개인을 구속한다. 겉으로는 자유와 평등의 옷을 입었지만, 속살은 여전히 ‘암묵적 카스트’라 부를 만한 구조다.
그러나 이 구조가 단순히 억압만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계급은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도록 만든 하나의 장치였다. 누군가는 지배를 맡고, 누군가는 생산을 담당하며, 이 불균형은 사회를 안정시키는 장치처럼 작동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고착화’였다. 계급이 역할 분담을 넘어서, 다른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때, 그것은 억압이 된다. 계급은 질서를 주지만 동시에 자유를 빼앗는다.
12.3 내란은 이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계급을 정말로 없앨 수 있는가? 역사는 낙관을 허락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은 귀족을 무너뜨렸지만, 곧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기득권이 자리를 차지했다. 20세기 혁명들은 ‘무계급 사회’를 표방했지만, 그 속에서도 권력자라는 또 다른 계층이 생겨났다. 계급은 언제나 사라지는 듯 보이면서도, 다른 얼굴로 돌아왔다.
이 사실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깨어 있게 한다. 계급은 어쩌면 인간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계급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만약 계급이 최소한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불평등을 넘어 도전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은폐된 특권과 세습에 의해 유지된다면, 사회는 썩고 병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동 계급 역시 단순히 현실의 경제적 문제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공동체에 적극 참여하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소양과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연대를 배우고 실천할 때, 암묵적 계급과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글쓰기와 토론,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고,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며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개인들의 의식 역시 변화해야 한다. 계급을 넘어선 사회적 성숙은, 바로 이런 교육과 자기 성찰의 결합에서 시작된다.
12.3 내란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거울이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본질을 마주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던 암묵적 계급, 권력의 사슬, 기득권의 그늘이 거울 속에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거울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진정한 평등을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이름으로 위장된 또 다른 계급 사회를 묵인하며 살아갈 것인가?
계급은 인간 사회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숙명처럼 우리와 함께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선택의 문제다. 기득권과 노동 계급 모두가 자신의 책임과 소양을 갖추고,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며 행동할 때, 그 고착화된 질서 속에서도 희망은 싹틀 수 있다. 12.3 내란이 드러낸 어둠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알렸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사회적 포지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억압이 아닌 배움과 성장, 책임과 연민의 구조가 되도록 만들어갈 것인가.
마지막으로,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삶과 인간성에 관한 선택이다. 계급의 그늘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빛을 키워야 하고, 그 빛이 서로 겹쳐져 사회를 밝히는 날을 꿈꾸어야 한다. 마치 밤하늘의 별빛들이 서로를 비추어 어둠을 걷어내듯,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통해 사회를 밝히고, 불완전함 속에서 완전함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비추는 촛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