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내가 원하는 시대를 가 볼 수 있다면?
쿠바 아바나에는 '암보스 문도스(Ambos Mundos)'라는 호텔이 있다.
스페인어로 '두 개의 세계(Both Worlds)'라는 뜻을 가진 이 핑크빛 건물은 헤밍웨이가 머물며《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자그마한 호텔이지만 나는 그 이름 자체가 사무치게 좋았다.
'두 개의 세계'라니!
그 호텔의 코너 방, 멀리 아바나 항이 보이는 그 방에서 헤밍웨이는 걸작을 써 내려갔다.
내가 그곳을 찾았을 때 헤밍웨이의 511호실은 공사 중이었다.
그의 타자기와 침대가 놓여 있다는 그 방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아바나에 머무는 내내 습관처럼 호텔 앞을 지나며 글을 쓰는 헤밍웨이를 상상했다.
그가 즐겨 찾았다던 술집 '엘 플로리디타'와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에 가서 다이키리와 모히토도 마셨다.
미국의 경제 봉쇄로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아바나.
색이 바래고 스러져가는 식민지풍 건물들과 매연을 뿜으며 굴러가는 1950년대의 올드카들.
그 쇠락의 풍경은 묘하게도 헤밍웨이가 호흡하던 시절의 화려했던 유령을 불러낸다.
낡았기에 오히려 선명해지는 과거의 흔적들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헤밍웨이의 어깨를 스치며 걷는 기분을 느꼈다.
가보지 못한 곳, 겪어보지 못한 시대에 대해 느끼는 이 기묘한 향수를 일컫는 단어가 있다.
바로 '아네모아(Anemoia)'다.
경험하지 않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 이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다.
그것은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불쑥 찾아와 마음을 흔든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이 '아네모아'를 영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주인공 길(Gil)은 밤마다 1920년대의 파리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곳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를 만나고, 달리와 대화하며, 고뇌하는 헤밍웨이와 술잔을 부딪친다.
예술과 낭만이 폭발하던 황금시대로의 시간 여행인 셈이다.
만약 나에게도 그런 마법이 허락된다면?
호텔의 이름처럼 '두 세계'를 오가는 문이 열린다면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아주 깊은 심연, 기원전 1200년경의 지중해다.
미케네 문명이 붕괴하고 그리스 폴리스가 세워지기 전까지의 약 400년. 기록이 사라져 역사학자들이 '암흑시대(Dark Ages)'라 부르는 그 침묵의 시간이다. 전설 속 '바다의 민족(Sea Peoples)'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파괴와 약탈의 흔적뿐이다.
문명은 후퇴했고 야만이 지배했다지만, 바로 그 혼돈 속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싹트고 철학의 씨앗이 뿌려졌을 것이다. 그 거친 땅에서 나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나오겠지만,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떤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
혹은 미국의 서부 시대로 돌아가 목숨을 걸고 길을 떠나던 이들의 마차에 올라타거나, 원주민 마을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생활하며 ‘늑대와 춤을’ 같은 멋진 이름을 얻어보는 건 어떨까?
시계를 조금 더 돌려 가까운 과거인 1930년대의 경성(京城)으로도 가본다.
종로 뒷골목 우미관 앞에서 긴 잇자국이 난 샌드백을 두들기는 청년 김두한의 눈빛을 보고 싶다. 식민지의 설움을 주먹 한 방으로 날려버리겠다는 듯 포효하는 야생적인 활기를 느끼고, 곧바로 근처 다방 '제비'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 구석 자리에는 퀭한 눈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천재 시인 이상(李箱)이 앉아 있을 것이다. 육체의 힘으로 시대를 돌파하려는 김두한과 난해한 언어로 시대를 비웃는 이상. 이 극단적인 두 청춘이 공존하던 경성의 밤거리를 이방인이 되어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발길을 돌려 당시 경성에서 가장 화려한 랜드마크였던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으로 향한다. 세련된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 틈에 섞여 진열장 속의 박래품(舶來品)들을 구경하다가, 이상의 소설 《날개》 속 주인공처럼 홀린 듯 옥상 정원에 오른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경성 시내는 화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빛을 띠고 있을 것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라고 읊조리던 시인의 마음을 짐작하며, 식민지의 공허한 번영이 빚어낸 그 웅성거림을 높은 곳에서 굽어보고 싶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가면 다시 현실이다. 빽빽한 아파트 숲과 숨 가쁜 일상.
이 건조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먼 훗날 누군가에게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 불릴지 모른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벨 에포크는 제1차 세계대전 전의 프랑스, 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한 '좋은 시절'을 뜻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그곳이 벨 에포크인 줄 몰랐다. 그 이름은 시대가 저문 후에야 붙여졌다. 화려한 물랑 루주의 캉캉 음악 속에도 훗날 찾아올 어두운 그림자는 이미 스며들고 있었다.
'현재'라는 말은 그래서 공허하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매 초를 규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하루나 한 달을 현재라고 부르기엔 범위가 모호하다. 흘러가는 강물 위에서 '지금'을 포착하기란 그만큼 힘든 일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임계점에 다다르고 인간의 욕망이 끝없이 폭주하다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처럼 핵미사일이 발사된다면?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매드 맥스〉 같은 황무지에서 우리가 숨 쉬는 지금을 '벨 에포크'라 부르며 그리워할 것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이 지점을 영리하게 꼬집는다.
길은 1920년대가 최고라 믿지만, 그 시대의 여인 아드리아나는 1890년대의 '벨 에포크'를 꿈꾼다.
그녀를 따라간 벨 에포크에서 만난 고갱과 드가는 오히려 르네상스 시대를 갈망한다.
영화는 우리가 품은 '아네모아'의 환상을 멋지게 그려낸 뒤 산산이 부숴버린다.
결국 우리가 가진 것은 '현재'뿐이며, 그곳을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
닿을 수 없는 역사의 빈 페이지를 기웃거리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느라, 정작 눈앞의 푸른 하늘을 놓치곤 한다. 내 등에는 'Yesterday is gone, tomorrow has not yet come(어제는 이미 지났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이라는 문구가 타투로 새겨져 있는데도 말이다.
현재에 충실하겠다고 몸에 새기기까지 했지만, 마음은 늘 청개구리처럼 시공간을 떠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온전히 현재에 머무르는 순간은 대단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틈새다. 제주 시골집에서 저녁 메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냉장고를 뒤져 차린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며, 머릿속 잡념들을 문장으로 옮겨 적는 바로 이 순간들.
비루한 현실과 화려한 상상. 나는 '암보스 문도스'라는 두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여행자다. 비록 아바나의 511호실은 아니지만, 나만의 '암보스 문도스'는 바로 여기 제주에 있다.
어쩌면 나의 벨 에포크는 먼 과거가 아니라, 두 세계가 만나는 바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찰나일지도 모르겠다.
오직 '오늘'이라는 시간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세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