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하루에 거짓말을 딱 세 번만 할 수 있다면?

by 두둥실

상상해 본다. 하루에 내뱉을 수 있는 거짓말의 총량이 ‘딱 세 번’으로 제한된 세상을.

설정은 이렇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에게는 세 개의 ‘거짓말 코인’이 지급된다. 선의의 거짓말이든, 사기를 치기 위한 악의적인 거짓말이든 상관없다. 사실이 아닌 말을 입 밖으로 낼 때마다 코인은 하나씩 차감된다. 만약 세 번의 기회를 다 쓰고 네 번째 거짓말을 하는 순간, 손목에 찬 밴드에서 강력한 전기 충격이 가해지거나, 통장에서 즉시 벌금 100만 원이 빠져나간다. 이런 세상이 오면, 우리는 더 정직해질까? 아니면 더 과묵해질까?


우리는 스스로가 꽤나 정직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연구 결과는 우리의 믿음을 가차 없이 배반한다.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교의 심리학자 로버트 펠드먼(Robert Feldman)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그는 처음 만난 두 사람을 10분간 대화하게 한 뒤, 그 내용을 녹화해 당사자들에게 보여주며 스스로 얼마나 거짓말을 했는지 체크하게 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참가자의 60%가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거짓말을 했고, 그들은 평균 2~3번의 거짓말을 쏟아냈다. “만나서 반가워요”, “옷이 참 잘 어울리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짧은 찰나에 우리는 공감을 얻기 위해, 혹은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사실을 비튼다. 펠드먼의 통계대로라면, 우리는 출근해서 동료들과 모닝커피를 마시는 10분 사이에 하루치 거짓말 할당량을 모두 소진하고, 점심시간부터는 전기 충격의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강제적 진실’의 상황은 꽤나 매혹적인 소재다. 류츠신의 SF 소설 <삼체>에 등장하는 외계 문명 ‘삼체인’들은 거짓말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뇌파로 소통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즉시 상대에게 전달된다. 숨길 수도, 꾸밀 수도 없다. 그들이 지구를 정복하러 오면서 가장 두려워한 것은 인류의 무기가 아니라, 속내를 감추고 기만할 수 있는 인간의 ‘거짓말 능력’이었다.

인류는 압도적인 과학 문명을 가진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가진 가장 불완전한 특성인 ‘기만술’을 최후의 무기로 삼는다. 영화 <라이어 라이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거짓말을 못 하게 된 변호사는 법정에서 의뢰인을 망신 주고, 상사에게 독설을 퍼붓는다. 스크린 속 그들의 곤경은 우리에게 웃음을 주지만, 그 웃음 뒤에는 서늘한 질문이 남는다. “과연 나는 진실만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하루 세 번의 제한이 생긴다면,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거대한 기만의 구조가 무너질 것이다. 정치인들은 선거철마다 남발하던 공약 앞에서 입을 닫을 것이고, 기업들은 과장 광고를 내보낼 수 없어 제품 설명서에 단점까지 깨알같이 적어야 할지도 모른다. 청문회는 침묵으로 가득 차거나, 전기 충격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사회적 투명도는 유례없이 높아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일상으로 시선을 돌리면 상황은 끔찍해진다. 거짓말은 악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회적 윤활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 요즘 좀 늙어 보이지?”라고 물을 때, “응,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피부가 칙칙해”라고 대답해야 한다면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철학자 파스칼은 '만약 모든 사람이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알게 된다면, 세상에 친구는 단 네 명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늦잠을 자서 지각했는데 상사에게 “죄송합니다. 어제 술 먹고 늦게 일어났습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손님이 맛없는 음식을 남기며 “배가 불러서요”라고 말하는 대신 “너무 맛이 없어서 도저히 못 먹겠네요”라고 말한다면? 아마 가게들은 줄줄이 폐업할 것이고, 연인들은 매일 밤 이별할 것이며, 직장에서는 멱살잡이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처 주지 않기 위해, 관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의 평판을 관리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얇은 가면을 쓴다. 거짓말 횟수의 제한은 곧 ‘예의’와 ‘배려’의 종말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결국 이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우리는 ‘말’ 자체를 줄이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루 세 번의 기회는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 나를 보호하거나 상대를 구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아껴두어야 하니까. 대신 우리는 침묵을 배울 것이다. 섣불리 동조하지 않고, 억지로 칭찬하지 않으며,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 거짓말이 사라진 세상은 정말로 ‘인간적인’ 세상일까? 인류학적인 시선으로 보면, 인간은 ‘이야기(Story)’를 만드는 존재이기에 비로소 인간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모든 이야기는 일종의 거짓말이다. 우리가 밤새워 읽으며 눈물 흘리는 소설, 가슴을 울리는 영화, 위로가 되어주는 음악 가사들을 보자. 그것들은 사실(Fact)의 나열이 아니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허구, 즉 ‘정교하게 세공된 거짓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작가들을 사기꾼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거짓말’이라는 그릇 안에 담긴 ‘진심’을 읽어내고 감동한다. 사실(Fact)만으로는 결코 전달할 수 없는 진실(Truth)이, 역설적이게도 거짓의 형식을 빌릴 때 가장 완벽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의 적나라한 현실을 조금 더 부드럽게 윤색하고, 차가운 사실에 온기를 불어넣는 행위. 그것이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되고, 때로는 사랑이 되었다. 하루 세 번의 제한이 생긴다면, 우리는 단순한 안부 인사뿐만 아니라 문학도, 예술도, 낭만도 잃게 될지 모른다.


결론은 너무나 뻔한 비유로 귀결된다. 칼은 의사가 쥐면 사람을 살리는 수술 도구가 되지만, 강도가 쥐면 흉기가 된다.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기만하고 착취하기 위한 거짓말은 사회의 독이지만, 상처를 덮어주고 관계를 지키며 삭막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거짓말은 삶의 윤활유이자 예술의 씨앗이다.


뻔한 결론이지만, 이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보면 풍경이 조금 달라진다. 우리는 저마다 하루치 거짓말 할당량을 채우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사기를 치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나쁜 것’이라는 도덕적 잣대로만 재단하지 않고,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복잡하고 슬픈 도구’로 바라볼 때, 우리는 타인을 조금 더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거짓말이 사라진 세상은 투명할지언정 따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날카롭고 투명한 유리 조각 같은 진실만으로는 우리네 삶의 울퉁불퉁한 틈새를 다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 밤도 기꺼이 속아 넘어가기로 한다. 소설가가 지어낸 허구의 문장에 눈물 흘리고, "영원히 사랑한다"는 영화 속 연인의 불가능한 맹세에 고개를 끄덕인다. 헐벗은 진실이 몰고 오는 시린 바람을 막아주는 것은, 결국 우리가 '거짓'이라 부르는 얇고 보드라운 외투들이다.


어둠이 내린 창밖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거짓말 그 자체가 아니라,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지어낼 다정한 이야기조차 남지 않게 된 삭막한 침묵이 아닐까. 오늘 당신은 자신과 타인을 위해 몇 번의 이야기를 지어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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