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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여행자 Sep 13. 2020

휴가 뒤에 남은 것

짧은 휴가를 마치고 내 작은 침실로 돌아오니 마치 긴 모험이라도 끝낸 기분이 든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올여름 휴가일과 휴가지는 몇 번이나 수정되었고 결국 지인의 배려로 가족들과 함께 숲 속의 작은 콘도에서 며칠 묵는 것으로 대신했다. 우여곡절의 휴가였지만 효과가 있었는지 더 좋은 하루들을 꾸려갈 에너지가 어느 정도 충전된 것 같다.


가만히 내 집을 둘러본다. 편안함이 느껴지는 한편 해야 할 일들이 보인다. 여름 내 열어둔 창문과 창틀을 닦아야겠고 빨 때가 조금 지난 이불 커버도 세탁해야 한다. 한동안 열지 않은 노트북엔 마치지 못한 원고가 묵묵히 잠들어 있다. 집과 일을 떠나 비현실적일 만큼 쾌적한 공간에 묵고 온 직후이기 때문일까 일상이 매일 해야 할 숙제의 집합처럼 느껴진다.      


문득 휴가지에서 조카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돌아온 밤, 조카에게 물었다. “오늘 하루 어땠어?” “응 아주 좋았어.” “뭐가 좋았는데?” “문제집도 풀었고 튜브 없이 수영도 한 거!” 해야 할 일을 하고 신나게 놀았다며 뿌듯해하다 금세 곯아떨어지는 조카를 보며 나는 ‘잘 사는 것’의 의미를 잠깐 생각했었다. ‘오늘 할 일을 하고, 신나게 논다’ 어른의 좋은 하루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정답은 언제나 쉽고 단순하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배운다.      


청소든 일이든 공부든 매일 신경 쓰고 들여다볼 일이 많다는 건 삶에서 지키고 싶은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을 잘 산다는 건 오늘의 할 일을 환영하여 정성껏 해결하는 것, 그리고 오늘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는 것 아닐까.

나는 내일 아침 일어나 보송보송한 이불이 선물할 즐거움을 기대하며 세탁기를 돌릴 것이다. 그리고 휴가 뒤에 보내기로 약속한 원고를 한 편 보내고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아껴둔 추리소설을 펼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것도 이제 그만 생각하기로. 내일의 할 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일단, 오늘은 오늘의 숙면에만 집중하기로.


*한전 사외보 <빛으로 여는 세상> 2020년 9-10월호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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