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은 고요하다. 숲도 동면에 드는 것 같달까. 이곳에 활기를 띄어주는 건 부족해진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동물들이다. 까치나 직박구리 같은 흔한 새뿐 아니라 우리 동네 숲엔 청설모도 사는데 청설모는 겨울잠을 자는 다람쥐와 달리 추운 겨울에도 자주 눈에 띈다. 풍요로운 가을에 도토리나 잣 같은 먹이를 나뭇잎 아래에 숨겨놓고 겨울이 되면 이른 아침부터 낮까지 여기저기 숨겨둔 먹이를 찾아 먹다가 겨울이 깊어져 그마저도 떨어지면 연한 나무껍질이나 겨울눈을 따먹기도 한단다.
마음이 참 힘들던 그때, 산책 중에 만난 청설모를 오래 보던 겨울날이 떠오른다. 모습은 다람쥐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왜 다람쥐처럼 겨울잠을 자지 않고 이 추운 날 저리 바삐 돌아다닐까 생각하다 조물주의 심오한 설계를 내가 어찌 이해하랴 하고 돌아섰었다. 솔직히 말하면 잠시 청설모가 부러웠던 것 같다. 그때 나는 한 영상 제작사에서 단기 알바 중이었는데 알바생의 무덤이라 불리던 그 곳은 겪어보니 악명을 능가할 만큼 비열하게 악랄했다. 그곳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항의조차 해보지 못하는 내 모습이었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었고 페이가 입금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 돈이 당장 필요하다는 침묵할 명분 또한 컸기에 나는 그곳에서 받아야할 돈을 챙겨 신속히 도망치는 편을 택했다.
그 곳만 벗어나면 모든 게 끝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내 몸과 마음은 한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찬 공기 속에서 그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청설모의 단순한 몸놀림이 물색없게도 부럽게 느껴질 만큼 말이다.
40대에 접어들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인간은 살아지는 대로 살다보면 못쓰게 돼버리기 쉽다는 사실이다. 동물이나 식물은 살아지는 대로 살아도 타고난 대로 자연스러운데 인간은 왜 그렇지 못할까.
어쩌면 인간만이 사고하는 존재 라서는 아닐까? 그런데 인간의 사고 능력은 불완전하다. 생각을 하다 말면 올바른 판단이 아닌 합리화의 길로 빠진다. 사자는 어미 토끼 앞에서 새끼 토끼를 잡아먹어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던가, 남들도 다 이렇게 한다던가, 이로써 어미는 큰 시련 앞에 강해질 기회를 얻었다던가 따위의 자기 합리화를 하는 법이 없다. 따라서 그냥 상위의 포식자, 사자로 살면 된다. 잘한 사자 잘못한 사자는 없다. 그러나 세상은 정글이 아니다.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이런 비유를 썼던 것을 반성한다.)
잘잘못을 구분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며 약한 자를 도와야한다는 사람 간의 쉬운 정답은 ‘하다만 생각’, 자기 합리화에 종종 가로막힌다. 보이는 내가 중요하다 합리화하며 내가 아닌 나로 살 수 있고, 남들 다 그렇게 살지 않느냐 합리화하며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그보다 더 많은 종류의 인격들이 종횡무진 충돌하는 세상에서 정답대로 살기란 어쩌면 거의 불가능할지 모르겠다. 청설모를 부러워하던 날 이후로도 내가 속한 세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비슷한 업종에서 일하며 함께 성장해 왔다고 믿은 또래 몇은 언제부턴가 직장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일찍 결혼해 진지한 이혼 위기를 넘긴 동료 한 명은 20대 여자 후배들 앞에서 남자의 바람기는 당연한 거니 얼른 결혼해 다른 잇속이나 챙기라며 목소리를 높인다고도 했다. 술에 취했을지언정 눈빛을 반짝이며 일터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분노하고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던 밤들을 기억하기에 더 씁쓸하다.
스무살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어른이 못돼 어른처럼 보이고 싶던 날들, 세상과 타협하여 적당히 물들고 오염되는 것이 어른처럼 보이는 가장 쉬운 길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 옳은지 의심하고 힘겹게 선택한 옳음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고 부끄러워할 때 비로소 희미한 성숙의 기회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멀쩡히 돌아가는 건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알고, 하고, 자신에게 솔직하고 당당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내 아픔에 빠져있던 그날, 내가 만난 청설모에게 겨울 숲은 그저 복잡한 머리를 쉬어주기 위해 산책 나오는 곳이 아닌 생존이라는 자기 임무를 완수하는 현장이었을 것이다. 청설모만큼이라도 살자는 마음을 품을수록 아마도 나는 더 자주 부끄러워지고 더 크게 위축될 것이다. 청설모 따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높은 곳에서 화려한 가면을 쓰고 떵떵거리는 걸 보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어쩌면 내가 믿는 정답에 끝내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도 뒤따른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 말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