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선 웃는 얼굴을 따라가세요

Day23 산 마르틴 델 까미노→ 아스토르가

by 게으른여름

2025.7.23 Wed | 25° | 6:30~14:10 (7h 40m) | 22.9km



어제 늦은 밤까지 밖에서 떠들고 노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던 것 같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시끄럽다는 생각도 못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늘 도미토리에서 잠을 자지만 어떤 날은 비몽사몽 하며 내 방인가?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오늘 아침도 깊은 꿈에서 깨며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을 보고서야 '아, 내가 집을 나왔지' 깨달았다. 여름의 순례자들은 정말 부지런하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기에 나도 서둘러 짐을 챙겨 출발한다.


8월이 다 되어가도 아침엔 여지없이 쌀쌀하다. 짐이 될 거라 생각했던 긴팔 바람막이가 아침 필수품이 되었다. 아직 어둑한 밖이지만 도로엔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린다. 한적한 시골 마을과 사뭇 다르다. 도시는 어디나 바쁘구나. 내가 빠져나온 정신없던 현실이 스쳐 지나간다. 생각에 잠겨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한참 서있는데 뒤에 오던 다른 순례자가 버튼을 눌러야 신호가 바뀐다고 알려주었다. 딴생각하지 말고 걷는데 집중하자. 집중.



첫 마을인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ibigo)까지는 7km를 넘게 걸어야 한다. 부지런히 걷었지만 출발 한 시간 반 만에 나보다 늦게 출발한 도영에게 따라 잡혔다. 어제는 늦게 출발해서 주변에 걷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여러 순례자들이 나를 지나친다. 새로운 사람들과 눈에 익은 사람들이 반반이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는 오르비고 강이 흐르는 한적하고 경치 좋은 동네였다. 이 동네에는 13세기에 처음 만들어졌다는 굉장히 긴 돌다리가 있다. 지금은 물줄기가 가늘어서 이렇게 긴 다리가 필요한가 싶게 보이지만 과거에는 큰 강이었다고 한다. 긴 다리를 건너면 몇 개의 바가 나온다. 다리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테라스가 있는 바에 들어가 아침을 먹기로 했다. 공복으로 길게 걸었더니 허기가 져서 오늘은 아메리카노가 아닌 라떼를 주문해 보았다.



그놈의 갈림길을 오늘도 또 만났다. 이번엔 여느 때와 달리 1.5km 더 긴 거리를 선택했다. 바닥에 이렇게 울상과 웃는 얼굴로 표시를 해두었는데 어떻게 울상 짓는 쪽으로 갈 수 있겠어. 스마일을 믿고 가보자! 스마일이 그려진 오른쪽 길을 들어서자 그 판단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듯 요상한 마네킹들이 계속 나타났다. 더 재미난 길이라는 게 설마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겠지? 한참 동안 주변에 걷는 사람도 별로 없고 먼지만 날리는 흙길이 이어졌다. 이 길을 선택한 것이 과연 잘한 것일까? 다른 길이 어지간히 별로 인가 보다.



'어..!' 황량한 길 한가운데 예상치 못한 풍경이 나타났다. 순례자를 위한 오아시스, 도네이션 바였다. 히피풍의 컬러풀하면서 내추럴한 장식들로 꾸며진 그곳엔 사과, 바나나, 복숭아 같은 여러 과일에 각종 시리얼, 빵, 우유, 쥬스, 커피 등등 없는 것이 없었다. 거기에 개와 고양이까지. 한참을 땡볕에 흙먼지를 마시며 걸어왔더니 이곳이 현실인가 환상인가 싶다. 지상낙원은 진부한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이곳은 정말.. 지상낙원 같았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오르비고 다리인 줄 알았더니 여기였네. 산 후스토 데 라 베가(San Justo de la Vega)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위치한 이곳의 이름은 'La Casa de los Dioses'. 처음엔 모두가 순례자인 줄 알았는데 몇 명은 봉사자였다. 뒤편엔 침대 네댓 개가 지붕만 있는 공간 아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마도 순례자들이 이곳에 며칠씩 머물면서 봉사를 하고 기부받은 돈으로 유지를 하는 듯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해먹에 기타를 치며 앉아있는 마틴을 발견했다. 부르고스 이후로 본 적이 없는데 이게 얼마 만인지.

"나는 네가 내 뒤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도 네가 내 뒤에 있다고 생각했어."

둘 다 서로가 더 느릴 거라고 생각한 게 웃기네. 잠시 후 이안도 도착했다. 그 역시 오랜만이다. 마틴과 이안은 체스를 두고 도영은 옆에 나란히 앉아 구경을 했다. 그렇게 있으니 셋이 이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가까워 보였다. 마틴과 이안은 길에서 만난 사이지만 아마 여기까지 계속 함께 걸어왔을지도 모르겠다. 도영은 그들을 처음 만났지만 별 다른 대화도 없이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고 있었다.


한쪽에 놓인 '어항에 손을 넣어 꿈을 낚아 보라'고 적혀있는 파란 상자가 눈에 띄었다. 안에는 파스타 속에 종이가 돌돌 말아져 있어 뽑아보았다. 'We are all connected and we are all one' 이곳과 너무 잘 어울리는 문구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자그만 파라다이스에 계속 늘어져 있고 싶지만 스틱이 녹슬기 전에 길을 떠나야 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지만 여운이 짙게 남았다. 아마 순례길이 끝나고도 잊지 못할 장소가 될 것 같다.



먼저 출발한 나와 도영 뒤로 마틴과 이안이 뒤따라 왔다. 마틴과 처음 만났을 때는 '20대의 어리석은 네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네가 있는 거다' 같은 철학적인 얘기를 해서 계속 곱씹게 만들더니, 넷이 모이니 서울 vs 파리 vs 홍콩 집값, 강남 스타일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뜻 같이 실없는 소리만 하면서 걷는다. 전엔 그냥 같은 길을 걷는 이방인들이었는데 쓸데없는 수다로 조금 더 가까운 친구가 된 듯했다.


목적지인 아스토르가(Astorga)에 들어서면서 마틴, 이완과는 길이 엇갈려 헤어졌다. 공립 알베르게로 가려했지만 도영이 어제 아스토르가 공립 알베르게에 베드버그가 나왔고, 그곳에 묵었던 사람들이 오늘 다음 목적지인 알베르게에서 거부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럼 어딜 가야 하지? 일단 너무 덥고 목이 말라 마트에서 쥬스를 사 먹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돈시몬 오렌지쥬스와 초코빵을 사서 마트 앞 공원벤치에 앉아 먹으며 곰곰이 생각하다 정신을 차려 그냥 공립을 가기로 했다. 마트에 가기로 한 것부터 멍청한 판단이었다. 이미 지나친 공립 알베르게와 마트는 왕복 5km 정도로 배낭을 메고 오갈 거리가 아니었다. 이럴 거면 그냥 다음 마을로 갈 걸 그랬지.



체크인을 하는데 봉사자분이 베드를 어퍼를 쓸 거냐 로어를 쓸 거냐 물어보셨다. 베드버그는 2층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정보를 본 듯해(정확하지 않은 정보임) 둘 다 2층을 쓴다고 했다. 도영이 우연히 듣기로 봉사자분이 "둘 다 2층을 쓴대" 하면서 좋아하셨단다. 1층을 달라는 사람이 많아서 그러신 거겠지. 아스토르가 공립 알베르게는 한 방에 이층 침대 2개가 놓여있고, 이런 방이 굉장히 여러 개라 어느 한 곳에 베드버그가 나왔다고 해도 쉽게 옮겨 다닐 구조가 아니었다.


식당을 찾으러 근처를 돌아보니 아스토르가는 오래된 건물이 많은 앤틱 한 마을이었다. 큰 광장에 많은 식당이 모여있었고 야외 테라스에 현지인들이 가득했다. 모두 동네 사람은 아닐 테고 스페인 내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인 것 같았다. 광장 한복판에 무대가 세워진 것을 보니 곧 행사가 있는 듯했다. 내가 머무는 중에 이벤트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산 마르틴에서 봤던 한국 여자 희정과 아스토르가 거리에서 다시 마주쳤다. 저녁에 맥주나 한잔하자며 인스타그램을 주고받았다. 저녁을 먹고 연락을 했더니 외국 친구와 함께 오겠다고 했다. 그녀는 덩치 큰 서양 남자 한 명과 나타났는데 둘은 오늘 숙소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만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고 언어 문제로 대화가 순조롭지 않은 상황인데도 남자가 희정에게 푹 빠진 게 한눈에 보였다. 희정도 초반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얼굴에 여유 있는 웃음이 가득했다. 야외 테라스가 너무 추워서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는데 우리의 술값 계산을 그 남자분이 다 해버렸다. 아마도 희정을 사주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나이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당연히 내가 가장 연장자일 텐데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이왕 얻어먹은 거 고맙다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레온 이후에 홀로 고독하게 걸을 거라 생각했는데 주변에 사람이 또 많아졌다. 어쩌다 함께 걷게 된 도영은 나이차이는 많지만 비슷한 류의 사람 같아서 흥미 있게 지켜보는 중이다. 엇갈린 사람들과도 다시 만나기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해서 더 반가운 사람들. 스마일을 따라가길 잘했어.


새로운 순례길 재밌네.


오늘의 침대 <Albergue de peregrinos Siervas de Maria>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