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4막 1장

Day22 레온 → 산 마르틴 델 까미노

by 게으른여름

2025.7.22 (Tue) | 29° | 8:00~15:30 (7h 30m) | 24.5km



헐.. 늦잠 자버렸네. 바짝 조이고 있던 긴장이 하루 동안의 자체 휴일로 늘어져 버렸다. 나는 늘 부지런한 새벽별을 보는 순례자를 꿈꾸지만 꿈은 이루지 못한 사람이 바라는 것이고 이뤘다면 그것은 계획이 되었겠지. 핑계를 대자면 숙소 침대에 커튼이 쳐져서 아침이 온 줄 몰랐고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 조용히 떠나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알람을 왜 듣지 못했는지는 모르겠네. 사실 늦게 떠난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없다. 그냥 조금 덜 더울 때 더 걷지 못하는 단점이 있을 뿐. 그리고 보통 다들 일찍 가니까(한국 사람들은 특히) 그래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커튼을 걷으니 가득 차 있던 침대가 모두 비어있고 건너편 도영은 신발이 놓여있는걸 보아 아직 자고 있는 듯했다. 하루 더 묵는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떠날 준비를 하는데 도영이 일어나 오늘 일찍 가신다고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자기도 오늘 숙소비가 비싸져서 그냥 떠나기로 했단다. 그렇게 늦게 일어난 사람끼리 자연스럽게 함께 길을 나선다.



도시를 빠져나왔는데도 계속 도시. 논 밭이 없는 풍경을 오랜만에 걷는다. 순례길의 챕터가 바뀐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딱딱한 길을 계속 걸으니 발의 피로가 금방 느껴졌다. 초반부터 생긴 발의 통증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래전 감각이 없어진 양쪽 엄지발가락과, 끊어질 듯 아프다가도 걷다 보면 괜찮아지는 뒤꿈치, 멍든 것처럼 아픈 발바닥. 그런데 또 겉으로는 물집 하나 없고 멀쩡한 발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전에 경험해 본 고관절 통증이나 물집은 정상적으로 걷기조차 힘들었는데 발바닥 통증은 견디기만 하면 멀쩡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이쯤이야. 큰 시련을 겪은 사람은 그보다 작은 시련은 이겨내기 마련이다.



함께 출발했던 도영이 훨씬 앞서 나갔지만 얼마 안 가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Valverde de la Virgen)에서 다시 만났다. 식당을 찾고 있다기에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둘 다 결정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마을의 끝에서 더 이상 고민 할 수 없어 마지막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테라스에 앉아 아침을 먹는데 멀리서 머리 위에 머리만큼 우뚝 솟은 배낭을 멘 자그만 동양 여자가 힘겹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꾸밈새가 아무리 봐도 한국 사람 같아서 지나갈 때 인사를 했더니 가방을 견디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인사를 하며 우리를 지나쳤다. 레온쯤 왔으면 짐을 이겨내거나 덜어냈을 텐데 저렇게 힘들게 걷고 있다는 건? 게다가 한국 사람을 만났는데 반가워하지 않는다면? 100% 오늘이 까미노 첫날이라는 추리를 해보았다. 여름 순례길이 성수기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사람이 많지 않다. 한국 사람뿐 아니라 외국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레어한 한민족이 반가울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그늘에 지쳐서 쉬고 있는 그녀를 다시 만나 물어보니 오늘이 첫날이라고 한다.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눈치여서 잘 걸어오시라고 인사하고 돌아섰다.



식당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더위를 못 이겨고 또다시 바에 들렸다. 하루를 쉬고 걸어서인지 오늘 길이 어려운 건지(약간의 경사로) 유난히 힘들고 지친다. 20Km 정도면 부담스러운 거리도 아닌데 줄지 않는 남은 거리만 자꾸 확인하게 된다. 얼음이 가득한 콜라를 마시고 출발한 뒤 두 시간 만에 또다시 바에 들렀다. 살려면 어쩔 수 없다. 모두가 맛있다고 했던 '띤또 데 베라노(Tinto de verano)'를 처음 시켜봤다. 맨날 먹어본다 하고 더위에 정신이 없어 콜라만 마셨는데 그동안 왜 안 마셨지 후회 될 정도로 맛있었다. 샹그리아처럼 깊은 맛은 없지만 달콤한 청량감이 더위를 식히기엔 딱 좋았다. 나처럼 정보도 없이 혼자 여행을 다니면 경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스페인, 두 번째 순례길이지만 처음 경험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오늘은 계속 도영과 함께 걷게 되었는데 얘기를 나눌수록 낯을 가릴 것 같은데 가리지 않고 말수가 적을 것 같은데 많은 반전이 있었다. 도영은 군대를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초반에 만났던 재형도 그렇고 제대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여행을 많이 떠나는 것 같았다. 재형도 도영도 일반적인 보직이 아니라 그런지 들려주는 군대이야기가 모두 재밌었다. 전공도 특이해서 호기심에 이것저것을 물으니 대답을 곧 잘해주어서 대화가 잘 통했다. 초반에 또래 두 명과 함께 걸었는데 한국인들을 더 만나보고 싶어서 앞엔 한국인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매일 조금씩 더 걸어서 남들보다 빨리 걷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쩌냐 나만 계속 만나고 있네.



오후 3:30이 다 되어서 탈진하기 직전 겨우 산 마르틴 델 까미노(San Martin del Camino)에 도착했다. 숙소를 골라서 온 것도 아닌데 시설이 깔끔하고 무엇보다 '수영장'이 있었다. 저녁도 가능하다기에 신청했다. 짐을 풀고 겨우 씻고 있는 기운 없는 기운 다 모아서 빨래까지 마쳤다. 손빨래는 정말 해도 해도 적응이 안 된다. 레온에서 오랜만에 마주쳤던 제임스와 앰버 부부를 숙소에서 다시 만났다. 순례길에서 가장 오래 본 사람들이고 항상 너무 반갑지만 그들이 늘 인싸 무리에 껴있고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니 대화를 나누기 부담스러워서 웃으면서 인사만 하고 마는 것 같다.


드디어 챙겨 온 수영복이 쓸모 있어졌다. 여름 여행은 물놀이와 태닝이 필수인데 그동안 숙소에 도착하면 진이 빠져서 근처에 수영장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늘어져만 있었다. 오늘 역시 힘든 날이지만 숙소에 수영장이 있으니 여기서 늘어져 있으면 된다. 뜨거운 태양이 걸을 땐 그렇게 숨 막히더니 가만히 누워서 쬐고 있으니 따뜻하고 좋기만 하다. 빨리 골고루 태워서 시커먼 팔과 나머지 피부가 같은 색이 되었으면 싶지만 몇 시간으론 택도 없겠지.



저녁은 14유로에 와인 한 병과 함께 애피타이저로 파스타, 메인메뉴로 닭다리와 감자구이,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주는 코스였다. 제대로 먹는 첫 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도영과 음식을 기다리다 낮에 만났던 한국 여자분을 다시 만났다. 또 마주친게 반가워서 함께 앉아서 먹자고 했더니 따로 할 게 있다며 멀리 다른 테이블로 가버린다. 우리 말 걸기 싫게 생겼냐고 자조하면서 아직 첫날이라 한국인의 소중함을 몰라서 그런 거라고 농담을 했다. 속 마음은 모르지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 멀리까지 여행 오며 기대한 게 있을 텐데 첫날부터 한국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원치 않을 수도 있을 테니. 정말 말 걸기 싫게 생겨서 그런 건데 정신승리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순례길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다. 인위적으로 챕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걷는 길의 풍경도 함께 걷는 사람도 바뀌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챕터가 바뀌는 시절이 있다. 이 길을 걷고 돌아가면 내 삶의 챕터도 바뀌어 있을까. 이 나이에 계획도 없이 일단 퇴사를 지르고 이렇게 걷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즐겁기만 하고 돌아가서 굶어 죽더라도 내 판단이 옳은 것 같다. 물론 이거 조금 걸었다고 깨달음을 얻거나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포루투갈 순례길도 특별한 경험이긴 했지만 내 삶이 바뀌진 않았다. 내 삶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내일 죽게 된대도 하나의 후회는 덜게 되겠지. 인생도 심플하게 오늘 걸을 걸음만큼만 잘 채우면서 살아가고 싶다.


내일도 내일의 몫을 성실히 걸어 봅시다.


오늘의 침대 <Albergue La Hu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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