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5 폰세바돈 → 폰페라다
늦게 일어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푹 자고 일어날 줄은 몰랐다. 모두 떠난 방에 도영과 나만 남아 있다. 이른 시간이라면 혼자 준비하고 출발했겠지만 지금 시간은 깨워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직 자고 있는 도영을 큰 소리로 불러 잠을 깨웠다. 온라인으로 동키를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동키 회사에서 오기 전에 서둘러 가방을 패킹하고 밖에 내놓아야 한다. 오늘은 1500m에서 500m까지 내려가는 내리막 길이다.
천천히 가는 김에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도영이 마음에 들어한 예쁜 직원이 있는 바에서 마지막 기회를 노려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어제 별을 본다고 했으니 우리처럼 늦잠을 잔 걸까? 인연이 아닌 걸로. 느슨한 늦잠 연대이자 거울치료 상대 도영을 만난 뒤로 마음이 편해졌다. 지구 반대편에서 비슷한 사람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내가 잘못됐거나 이상하지 않다는 위안도 됐다. 도영과 비슷하면서 다른 점은 같은 상황에서 나는 불안해하고 도영은 태평하다는 거다. 이렇게 태어났으면 저렇게 살았어야 맘 편하게 잘 살았을 텐데.
각자 페이스 대로 걸으면 도영이 훨씬 앞서 나가겠지만 오늘의 하이라이트 철의 십자가에서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곳까지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 철의 십자가에는 집에서부터 가져온 돌멩이를 십자가 주변에 내려놓으며 소원을 비는 전통이 있었다. 생장의 알베르게 사장님이 철의 십자가에 두라며 작은 돌을 주셨는데 배낭에 넣어 놓고 그대로 동키를 보내버렸다. 행위보다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합리화를 해보지만 조금만 더 신경 쓸 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돌멩이를 챙겼어야 했는데. 철의 십자가를 떠나오면서 내가 이 길 위에서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보았다. 매일 쫓기듯 나와 지칠 때까지 걷는다. 왜 걷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았다. 나는 생각도 의미도 없이 걷고 있는 건가.
낯선 곳에서 길게 걷고 싶었다. 늘 무언가를 넘치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루 종일 걷기만 한다면 생각이 조금 정리가 될까. 20대엔 이런 이유로 산티아고로 가고 싶었다. 체력이 안 돼서, 시간이 안 돼서, 언젠가, 나중에 하면서 계속 담아두기만 했던 길을 십수 년 만에 갑자기 오게 된 이유는 그냥 계속 하고 싶던 거니까. 인생에 나중은 없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달은 후로 가장 먼저 해야겠다고 결심한 일이 순례길 걷기였다. 수십 년을 안고 온 넘치는 생각과 불안은 걷기가 아닌 현대의학으로 사그라들었다. 걷고자 한 이유는 사라졌지만 걸을수록 이곳에 온 내가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매일이 즐겁고 만족스러운데 다른 의미를 꼭 붙여야 할까. 그냥 잘 걸어보자. 이번 달의 소원은 이 길의 무사 완주이고 오늘의 소원은 폰페라다까지 잘 걸어가는 것이다.
철의 십자가에서 몰리나세카(Molinaseca)까지는 급격한 하산길이다. 화살표를 따라가는 순례길은 흙, 돌길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고 조금 더 완만한 아스팔트 찻길은 뱅글뱅글 산을 돌아 내려가는 길이다. 처음엔 순례길을 따라 걷다가 길이 거칠면 찻길을 따라 걸었다. 마주 오는 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급 커브길이나 반대로 너무 멀리 돌아가는 길에선 다시 순례길로 돌아왔다. 비슷한 고도의 피레네를 걸을 땐 구름이 걸친 산세만 바라봤는데 오늘은 날씨가 선명하게 맑아서 몽골 유목민이 된 것처럼 먼 곳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한 달만 이곳에 살면 난시가 다 교정될 것 만 같은 선명함이었다. 매일 맑은 날씨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것도 모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을 내려와 쉬고 싶을 때 즘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os)에 도착했다. 어느 집 앞에 도네이션 간식 테이블을 차려놓은 것을 보고 냉큼 다가가 수박 펀치를 집어 들었다. 허겁지겁 들이켜 메마른 몸에 달고 진한 수분을 충전했다. 내 뒤로 내려올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테이블엔 과일과 음료가 가득이다. 이걸 다 어떻게 처리하려는지. 과일은 내일 쓸 수도 없을 텐데. 이런 걱정을 하며 걷다가 니 걱정이나 하라던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여기서도 사서 남걱정을 하고 있다니.
몰리나세카로 내려가기 직전은 경사진 돌길이다. '수비리로 가는 하산길', '용서의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 그리고 오늘 '몰리나세카로 가는 하산길'을 프랑스 길 내리막 3 대장이라 하겠다. 어느 길이 더 나쁘냐 말할 수 없이 막상막하 하드코어 길이다. 이런 길을 내려올 때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오로지 길에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다.
거친 돌길을 내려와 만난 몰리나세카는 잔잔한 강이 흐르는 작고 예쁜 휴양지였다. 저 강가에 나도 눕고 싶다. 이렇게 예쁜 마을인 줄 알았으면 여기서 머물러도 좋았을 것을. 몰리나세카의 많은 바 중에 하필 내가 들어간 곳은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다. 피자 박스에 인쇄되어 있을 것처럼 생긴 덩치가 큰 주인아저씨는 주문도 늦게 받아주고 퉁명스러웠지만 지금 필요한 건 콜라일 뿐이라서 얼음잔과 콜라를 제대로 주었으니 다 괜찮았다.
시간은 벌써 3시가 넘었다. 등 뒤에서 시작된 해가 머리를 넘어와 이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 뜨겁고 눈이 부셔 햇빛을 헤치며 걷는 기분이다. 한껏 달아오른 아스팔트와 작열하는 태양 사이를 걷는 나약하고 바싹 마른 순례자는 마지막 갈림길에서 망설임도 없이 더 짧은 길을 택했다. 스페인의 한 여름 늦은 오후에 도로를 걷는건 마치 열풍 건조기에 들어간 육포가 된 것 같다. 5시가 다 되어서야 폰페라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들어온 나를 보고 봉사자분이 물을 건네주셔서 단숨에 한 컵을 모두 들이켰다. 이곳은 기부제이지만 보통 10 이상을 낸다고 말씀하셔서 카드 단말기에 10을 눌렀다.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몸에 문제는 없냐며 의료봉사단이 무료 진료를 하고 있으니 원하면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며칠 전 왼발 옆꿈치에 작게 생긴 물집이 오늘 크고 봉긋한 물집으로 자라 버렸다. 안 그래도 조치를 해야 했는데 완전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침대에 가방을 풀고, 씻고, 먼저 도착해 있던 도영과 빨래를 모아 세탁기를 돌리고, 의대생이나 간호대생으로 추측되는 여학생에게 전문적인 도구로 물집 치료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을 끝내고 나니 허기가 몰려온다. 아침으로 먹은 바나나 이후 계속 수분만 섭취했다. 한 끼 먹는 식사를 맛있게 먹고 싶어서 근처 식당의 별점을 둘러봤다. 평이 좋은 13유로짜리 메뉴 델디아집이 눈에 띄었다. 도영까지 꾀어서 왔는데 지금은 식사 주문이 어렵고 주방장이 출근해야 가능하단다. 식사 후에 마틴, 이안과 숙소 마당에서 맥주를 마시기로 했지만 오늘의 보상을 그냥 그런 음식으로 대체할 수 없어 주방장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한 시간을 기다려 주문한 식사는 치즈와 하몽을 시작으로 새우구이, 미트소스 파스타, 닭구이, 후식까지 푸짐하고 다양한 코스에 맛도 괜찮았다. 다행히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니 10시가 가까웠다. 마당에 마틴과 이안뿐 아니라 제임스와 앰버 부부, 다른 사람들까지 잔뜩 모여있었고 맥주 모임은 파하는 분위기였다. 주방장을 기다리느라 식사가 늦었다는 말을 이해해 줄지 모르겠지만 구구절절 설명이 어려워 그냥 이상한 변명인 채로 두었다. 이렇게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라면 어차피 구석에서 웃고만 있었을 테니 차라리 늦게 온 게 잘 됐다 싶기도 했다.
오늘 숙소도 아스트로가 공립처럼 여러 개의 방이 있고 한방에 2층 침대 두 개씩 4명이 사용하는 구조였다. 함께 체크인을 한 것도 아닌데 도영과 제임스, 앰버 커플까지 4명이 함께 방을 쓰게 됐다. 반가운 우연이다. 방으로 돌아와 한참을 이야기를 나눴다. 내 직업을 다시 확인하려고 묻길래 콘서트 같은 공연을 만들었다고 얘기했던 전과 달리 그렇기도 하고 최근에는 공연장에서 일을 했다고 정정해 주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무슨 일을 하다 왔는지 말하게 됐는데 그럴 때마다 내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가장 오래 일한 분야를 떠난 지는 한참 되었고 범위가 넓어진 지금은 콕 집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분야가 없었다. 크게 보면 같은 카테고리지만 잦은 이직과 다른 업무들이 나조차도 혼란스러웠다. 나는 뭘 하는 사람일까?
이곳에서의 나는 느리게 걷는 사람이다. 신나게 떠들다 내일 일어날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선다.
"매일 일찍 나가려고 하는데 늦게 일어나."
"우리도 그래."
"ㅎㅎ 우리 다 늦는 사람들이잖아."
늦게 걸어와 한방에 머물게 된 네 사람. 우연이 아닌 만날 사람들이 결국 만나게 된 것만 같다.
오늘 숙소와 산티아고의 거리는 210km라고 한다. 내일은 100km 대가 된다.
산티아고가 잡힐 듯 계속 멀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