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4 아스토르가→ 폰세바돈
2025.7.24 (Thu) | 24° | 7:50~16:00 (8h 10m) | 26.6km
"쾅! 쾅! 쾅!"
누군가 문을 세개 두드려 잠에서 깼다. 알베르게 봉사자들이 각 방을 돌며 아직 자고 있는 순례자들을 깨우는 소리였다. 오늘도 빨리 나가긴 글렀네. 건너편 침대의 도영도 이제 막 일어나고 있었다. 오늘은 오르막을 걷는 코스라 동키 서비스를 예약해 두었다. 7시 30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키 회사가 8시쯤 픽업을 시작한다고 알고 있어서 마음이 급해졌다. 정신없이 준비하고 배낭을 꾸려 8시가 되기 전 픽업장소에 배낭을 놓았다.
아스토르가(Astorga)를 나오는 길에 어제 보지 못했던 가우디가 만든 주교궁과 아스토르가 대성당을 지나쳤다. 이 두 곳이 아스토르가의 주요 관광스팟인 듯 보였다. 가우디 건축물답게 애니메이션에서 나올법한 독특한 외형의 주교궁을 겉모습만 훑고 지나려니 아쉬웠다. 마트를 다녀온다고 기운을 다 빼지만 않았어도..
40분을 걸어 첫 번째 마을 발데비에하스(Valdeviejas)의 작은 예배당(Ermita del Ecce Homo)을 만났다. 다들 이곳에 들르길래 따라 들어가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았다. 모두가 이 소박한 예배당을 왜 그냥 지나치지 않는가 했는데 알고 보니 보통 장소가 아니었다. 성인이 우물에 빠진 순례자를 살려낸 기적이 있는 곳이라나. 어딘가엔 '이곳에 기부를 하면 즉시 수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게 된다'라고 적혀 있다는데, 그걸 몰랐기에 도장만 받고 온 나는 당분간 계속 수렁에 빠져있을 예정이다.
도영은 어제오늘이 40km 넘게 걷던 때보다 더 힘들었다고 했다. 가끔 대화를 하면서 내 속도를 맞춰서 걸었던 것이 페이스가 맞지 않아서 힘이 들었나보다. 걷다 보면 리듬을 타면서 속도가 붙게 되는데 반대로 천천히 걸을 땐 스텝도 엉망이고 하중이 두배로 느껴진다. 앞으로는 각자의 페이스 대로 걷자고 했다.
도영을 보면 어린 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잠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결정을 잘 못하는 것, 미리 계획하지 않는 성향, 이상한 고집,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 장래희망도 그 나이 때의 나 같았다. 물론 다른 점도 많았는데. 나보다 훨씬 공부를 잘해서 똑똑한 버전의 나는 저런 모습일까 투영해 보게 된다. 마치 거울치료를 하라고 만나게 해 준 인연 같았다.
각자 걷기로 하고 얼마 안돼 마틴과 이안이 나타났다. 다시 넷이 함께 걷는 길. 어제 보다 더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걷는다. 홍콩에서 온 이안은 한국 문화를 좋아해서 웬만한 방송 프로그램이나 연예인을 알고 있었고 눈치로 한국어를 알아들었다. 파리에서 온 마틴은 영어와 스페인어가 유창했지만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생소한 한국어에도 관심이 생겼다. 다들 나보다 한참 어리긴 해도 20대 중후반인데 대화 수준은 초딩이다. 도영이 한국 욕을 알려주고, 둘은 욕을 따라 하다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큰 소리로 불렀다. Chat GPT로 서로의 속어를 찾아 읽으며 깔깔 거린다. 이렇게 유치한 대화를 하면서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음악 이야기 중 도영과 이안이 퀸을 모른다고 해서 마틴이 'don't stop me now'를 들려주었다. 노래를 들어도 두 사람은 모르겠단다. 퀸을 모르는 세대와 대화하고 있다니. 나의 퀸 최애 곡이기도 하고 걸으면서 듣기에 딱 좋아서 계속 듣자고 하고 따라 부르면서 걸었다. 뜨거운 태양과 가끔씩 부는 시원한 바람, 멈추지 않는 다리와 스틱을 휘젓는 손. 지금 기분이 말 그대로 돈 스탑 미 나우다. 그렇게 마틴과는 말이 통하는 것 같았는데, 한국에서도 유명한 프랑스 음악을 알려주다 조르디를 얘기하니 마틴도 도영도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너무 옛날 가수를 말해서 미안하다. 하.. 셋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한다.
오늘의 목적지인 폰세바돈(Foncebadon)은 1400m 고도에 있어 계속 오르막길이다. 지나치는 마을마다 바에 들러 콜라를 마시고 양말을 벗어 발을 말려주었다. 마틴이 내 발가락 양말을 가리키며 놀렸다. 처음엔 양모 양말 하나만 신었었다. 점점 심해지는 발바닥 통증이 트래킹 샌들의 딱딱한 바닥 문제 같아서 쿠션감을 주려고 발가락 양말까지 겹쳐 신게 됐다. 아무래도 신발이 문제인 것 같은데 발은 이미 망가져 버렸고 다른 신발이 괜찮다는 보장도 없으니 끝까지 신고 가보려고 한다.
오후가 되면 더더욱 속도가 나지 않는 나는 결국 셋보다 한참 뒤처져서 걷게 되었다. 웃고 떠들면서 한껏 올라갔던 텐션이 뜨거운 더위에 발 끝까지 녹아내렸다. 챙겨 나온 물도 다 떨어졌지만 있다 해도 꺼내 마실 기운도 없었다. 터덜터덜 화살표를 따라 길을 오르다 보니 탁 트인 초록 풍경이 사방에 펼쳐졌다. 길과 풍경을 번갈아 보며 걷다 보니 산 위의 작은 마을 폰세바돈,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폰세바돈에서 셋과 다시 만났다. 하지만 마틴과 이안은 다음 마을이 목적지였고 더 이상 걸을 생각이 없는 나와 도영은 이곳에 멈추면서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순례자들 무리가 동그랗게 모여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알베르게가 핫해 보였지만 내가 배낭을 보낸 조용한 알베르게에 체크인 했다. 나도 도영도 빨래를 싫어해 어제부터 자연스레 세탁기 메이트가 되었다. 주변 식당을 찾아 나섰다가 둘 다 결정을 못하고 그냥 머무는 알베르게 식당에 저녁을 신청했다. 18유로에 에피타이저와 메인, 후식과 와인이 나오는 코스. 메인요리는 소고기를 주문했다. 평소에는 고기를 즐기지 않는데 순례길에서 일 년 치 고기를 다 먹고 다니는 것 같다. 부디 이 단백질들이 다리 근육으로 잘 붙어주기를.
식사 후 동네 구경을 다녀온 도영이 다른 알베르게의 바에서 너무 예쁜 직원을 봤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가 다른 직원과 별을 보러 가자는 대화를 했다기에 우리도 합류하자고 부추겨 바로 바(bar)로 달려갔다. 내가 늘 미란다커를 닮은 호주 여자애가 예쁘다고 말해도 도영은 별 반응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둘을 옆에서 구경할 생각에 광대가 솟아올랐다. 도파민 게이지가 차오른다. 문 앞에서 마주친 그 여자는 우리를 보고 미소 띤 단호한 말투로 '문을 닫았어. 미안' 하더니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차올랐던 게이지가 떨어진다. 재밌을 뻔했는데.
말이 나온 김에 하늘과 가까운 이 마을에서 별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주인에게 밤늦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 물었다. "나갈 수는 있지만 밖에서 문을 열 수 없어서 다시 들어올 수 없어." 못 들어올 거라 했지 나가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 문틈에 뭔가를 끼워두고 나가면 되지 않을까. 혹시 모르니 도영과 교대로 나가 보기로. 다른 순례자들은 새벽에 매일 본다는 별인데 이렇게 작전을 세워야 볼 수 있다니.
11시쯤 첫 시도는 여전히 하늘이 밝아서 실패였다. 어두워지길 기다리다 선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 나갔다 온 도영이 지금 별이 잘 보인다고 알려주었다. 몸이 무거워져 그냥 자버릴까 싶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이번 순례길에선 다시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방의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외부로 나가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스틱을 끼워두고 깜깜해진 밖을 둘러보았다.
조명이 환한 건물 주변을 벗어나 까만 공터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셀 수 없이 가득한 반짝이는 별들. 다들 왜 스토리에 새벽하늘을 찍어서 올렸는지 이해가 됐다. 수고스럽게 볼만한 밤하늘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갑자기 엄마가 떠올랐다. 어릴 적 여름밤 엄마와 가끔 집 주변에 나란히 앉아 하늘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때 나는 어른이 되면 비행기를 아주 많이 탈 거라고 했다. 한참 어른이 되었지만 어린 나의 바람처럼 비행기를 아주 많이 타는 사람이 되진 못했다. 그래도 비행기를 타고 이 먼 곳에서 별을 보고 있구나. 우리가 보는 별은 지금의 별이 아니라 과거의 별의 빛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때의 별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계속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마치 오늘을 위해 그날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침대로 돌아왔지만 감정이 차올라서 잠 못 들고 한참을 뒤척였다. 유치한 농담만 잔뜩 한 날이었는데 이렇게 울며 잠들 줄은 몰랐다.
별 수 없이, 내일도 늦잠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