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오스, 에스트렐라 갈리시아

Day26 폰페라다 → 빌라프랑카 델 비에르조

by 게으른여름



이쯤 되면 새벽에 출발하겠다는 마음을 버리는 게 편할 것 같은데 나는 왜 밤마다 모순의 파이팅을 다짐하는가. 죽을 것 같은 더위에 걸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내 몸은 더위보다 잠을 택했다. 옆 침대의 앰버 커플이 먼저 일어나 조용히 짐을 싸고, 그 소리에 잠에서 깬 내가 윗 층의 도영을 깨웠다. 느린 네 사람이 모인 방에는 일찍부터 부산을 떠는 사람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여유 있는 아침을 시작한다.



사실 폰페라다는 까미노를 준비할 때부터 나를 긴장하게 만든 곳이었다. 최근 이곳에서 이른 새벽에 떠나는 순례자를 노린 강도를 만났다는 후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피레네를 넘는 것보다 강도가 더 큰 걱정이었다. 나쁜 사례들만 찾아 읽으며 폰페라다에서 떠날 때는 꼭 숙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출발해야지 다짐했다. 그런데 정작 오늘은 혼자 길을 나섰고, 해는 이미 중천에 떠서 강도는 자러 들어가 버렸다. 이만큼 살았는데도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나 보다.


미지의 나. 어젯밤 이후로 내 정체성에 대해 계속 곱씹어 보게 됐다. 어떤 것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면 문제가 있지 않나. 내 레이어가 잘못 쌓여 온 것은 아닐까.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어야', '그때 그걸 했어야'. 이미 몇 번 했던 후회를 또 해본다. 그렇다면 내 마지막 선택은 어땠을까. 분명 커리어상 좋은 자리였지만 견딜 수 없는 이런저런 이유로 박차고 나와버렸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한심한 판단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왔든 결국 이런 스토리가 됐을 것 같다. 문제는 선택이 아닌 나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쉬지도 않고 10km를 걸었다. 캄포나라야(Camponaraya)에서 오랜만에 포도밭을 다시 만났다. 프랑스 길의 절반 이상이 포도밭과 해바라기 밭인 것 같다. 며칠째 한국인은 도영과 희정밖에 보지 못했는데 오늘 길에서 부르고스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지원과, 함께 걷고 있는 세은을 만났다. 스무 살이라는 세은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출발일이 가장 빨랐다. 기본 코스와 달리 매일 짧은 거리로 천천히 걷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스쳐 보냈을 텐데 어린 나이에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지키면서 걷는 모습이 뚝심 있어 보였다.



오늘은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 카카벨로스(Cacabelos)의 라면과 밥 그리고 김치를 함께 주는 식당을 방문하는 것이다. 부르고스의 한식당, 카스트로헤리츠의 비빔밥을 주는 알베르게, 엘 부르고의 라면을 파는 집 모두 실패했기 때문에 오늘은 반드시 먹어야 한다. 해외여행 중에 한식 찾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오기가 생겼다. 나의 영업으로 지원과 세은, 훨씬 앞서 걷고 있는 도영도 함께 가기로 했다. 마을에 들어서니 식당 오픈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근처 바에서 쉬면서 오픈을 기다렸다. 오픈시간인 12시가 조금 넘어 찾아갔지만 여전히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오늘도 실패인가.. 10분 후 사장님이 도착해 셔터를 올리셨다. 오늘은 성공이다. 이곳의 한식 메뉴는 신라면과 짜파게티다. 기대했던 신라면을 주문했는데 세상에.. 밥은 있지만 김치가 없단다. 이건 절반의 성공인 걸까. 라면은 마트에서 쉽게 사서 먹을 수 있다. 내가 원한 것은 라면+밥+김치의 조합이었는데. 실망스러웠지만 라면과 한국식 찰진밥을 먹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카카벨로스는 화이트와인이 유명한 곳이다. 마틴이 피에로스(Pieros)의 바를 공유해 주어서 나도 뒤늦게 합류했다. 들어서니 외부 테이블에 서양 순례자들 십 수명이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아마 영어권 커뮤니티에 알려진 곳 같았다. 목이 너무 말라 콜라 생각이 간절했지만 유명하다는 화이트와인을 주문했다. 와인을 마시니 더위에 한껏 달아오른 뺨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늘어질 것 같아 먼저 출발했지만 얼마 못 가 바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내 옆을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오늘 역시 만만치 않은 더위다. 계속 도로를 걷는 길이라 열기가 두배로 느껴졌다. 축축 쳐져 걷는데 뒤에서 나타난 마틴이 내 걸음에 맞춰 함께 걸어주었다. 이야기를 하며 걸으면 정신이 딴 데 팔려 힘든 것을 잠시 잊게 된다. 그렇게 와인 먹은 구운 통닭처럼 익어가다가 4시가 다 되어 목적지인 빌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에 도착했다.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의 배경이기도 한 빌라프랑카는 계곡이 흐르는 조용한 시골 동네였다. 알베르게 사장님이 계곡 상류에 공공 수영장이 있다고 알려주어서 짐을 풀자마자 그곳으로 갔다. 인공 수영장이 아닌 계곡의 특정 구역을 수영을 할 수 있게 지정해 놓은 곳이었다. 날이 이렇게 뜨거운데 계곡은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물속에 들어간 마틴과 도영이 들어오면 괜찮다며 불렀지만 발만 담그는 것에 만족하고 잔디에 앉아 햇빛을 맞으며 맥주를 마셨다. 주변에 가득한 사람들 중에 순례자도 몇 팀 보이지만 대부분이 현지인이었다. 이런 완벽한 여름의 오후가 이들의 일상이라니. 제임스와 앰버 커플이 도착해 맥주를 사주겠다고 하니 한참 거절하다 마지못해 알겠다고 받아준다. 마틴도 왜 내가 맥주를 샀냐며 다음엔 꼭 자기가 사겠다고 했던걸 보면 나이 많은 사람이 사는 문화가 당연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면 내가 영어를 못해서 늙은 동생 같아 보이나?


에스트렐라 갈리시아(Estrella Galicia)는 스페인 맥주다. 우리나라 카스쯤 될까. 이날 내가 마신 맥주도 에스트렐라 갈리시아였다. 첫 캔까지는 괜찮았는데 두 캔째 점점 취기가 오르더니 나중엔 완전히 취해버렸다. 먼저 들어가겠다고 일어나 숙소가 이렇게 멀었나 괴로워하며 거의 비틀거리면서 들어온 것 같다. 그 와중에 할 일은 해야 해서 세탁기에 돌려놨던 빨래도 널고 샤워까지 했지만 취기가 가시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온 앰버에게 '이 맥주 뭐야? 나 완전 취해버렸잖아. 지금 기분이 너무 좋은데'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침대에 드러누웠다. 맥주 두 캔에 넉다운이 되다니.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모두 저녁을 먹으러 나갔는지 숙소가 조용했다. 텅 빈 숙소에 저 멀리 나처럼 두 캔을 마신 마틴도 뻗어서 누워있었다. 나 혼자 취했다면 내가 술이 약한 사람이겠지만, 마틴도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이 맥주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스페인 하숙을 찍었던 알베르게에서 나도 인증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빌라프랑카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간다.


에스트렐라 갈리시아.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오늘의 침대 <Albergue L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