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8 오 세브레이로 → 트리아카스텔라
2025.7.28 (Mon) | 25° | 8:20~17:10 (8h 50m) | 22km
일어나서 짐을 싸는데 마틴과 도영, 이안이 모여 숙덕거리고 있다. "무슨 일이야?" 다가가서 물어보니 셋 다 말없이 웃기만 한다. 말이 통하는 도영을 붙잡고 재차 물었더니 어젯밤 내가 맨날 예쁘다고 했던 호주 여자애와 기타 메고 다니던 미국 남자애가 숙소 안에서 사랑을 나눴단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여기 100명이 같이 자는 곳인데? 팔 뻗으면 옆 침대에 손이 닿는 거리인데? 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어젯밤에 너무 꿀잠을 자버렸네. 한 달 가까이 이 생활을 하다 보니 다들 익숙해지고 적응이 되긴 했지만 걔들은 알베르게가 정말 집 같았나 보다. 상식 밖의 소식에 어이가 털린 채로 시작하는 하루다.
약속을 하진 않았지만 모두 느긋하게 일어나 어제 저녁을 먹었던 바에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마틴은 단체 채팅방을 만들겠다며 본인과 제임스, 앰버, 이안, 도영, 나를 한 방에 모았다. 방 이름은 'Always Late'. 늦게 출발하기도 하고, 늦게 도착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주니 걷다가 우연히 만나던 사이에서 함께 걷는 공동체로 묶인 기분이다. 나는 평균보다 걷는 속도가 느린 편이고, 나머지는 속도는 빠르지만 자주 오래 쉬어서 천천히 걷는 타입이다. 그들과 똑같이 출발하면 한없이 뒤처질게 분명하니 아침을 먹자마자 서둘러 먼저 출발했다.
오늘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약 8km 거리의 파도르넬로(Padornelo)까지 가서 목적지인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까지 12km를 내려가는 하산길이다. 먼저 출발해서 부지런히 속도를 내도 한 시간 반 만에 마틴과 도영에게 따라잡혔다. 초반에 속도를 내는 것이 나만의 전략인데 영 속도가 나지 않는다. 마지막 오르막을 올라 파도르넬로에 도착하니 앞서간 마틴과 도영이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날씨가 많이 덥지 않아서 계속 걸을만한 컨디션이지만 이곳의 거대한 세인트 버나드가 너무 귀여우니 그 핑게로 잠시 쉬어간다. 다음으로 도착한 제임스와 앰버. 어제 발의 통증으로 중도에 포기했던 앰버는 느리긴 하지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평생 운을 이 길에서 다 쓰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계속 날이 좋다. 게다가 오늘은 기온도 적당히 뜨거워서 천천히 걸으면서 풍경을 감상하기 딱 좋은 날이다. 이렇게 좋은 날이 계속되면 불안해지곤 했는데, 지금은 어쩐 일인지 온전히 그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지나친 일광욕의 영향일지 수십일 동안의 걷기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세로토닌이 충만한 요즘이다. 사람을 상대하는데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 일이 아니라면 사람을 피하던 내가 거리낌 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듯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이에서 이야기가 생기고, 여러 가지를 겪는.. 이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걷는 속도가 빨라지지는 못한다. 파도르넬로에서 함께 출발했지만 혼자 한참 뒤처져 버려 앞서간 도영에게 숙소 상황을 물었다. 그런데 웬걸 다들 숙소를 잡지 않고 바에 앉아서 쉬고 있다고. 똑같이 느린데 왜 나만 항상 조급해하는 걸까. 트리다카스텔로에 도착하니 3시가 다 되었다. 마을의 첫 바에 앉아서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신나게 웃고 있는 마틴과 이안, 도영의 테이블에 합류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간단한 소통이 아닌 하고 싶은 말을 하려면 ChatGPT가 필요하지만 이제는 많이 편해진 도영에게 자꾸만 통역을 부탁하게 된다. 한다 한다 하지만 말고 영어 공부 좀 할걸.
희정과 함께 걷는 이탈리아 남자는 셰프다. 희정이 도영에게 오늘 이탈리아 친구가 요리를 할 거니 자신들이 머무는 숙소로 오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도 모두 그 숙소로 가기로 했다. 어제 저녁을 함께 먹으며 모두 통성명은 끝났으니 우리도 셰프의 저녁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6명이 체크인을 하니 침대 6개짜리 단독방을 쓰게 됐다. 마틴은 프라이빗룸이라며 신이 났다. 희정 일행을 만나 8명이 우르르 마트에 몰려가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스파게티와 볶음밥, 와인, 그리고 내가 질색하는 에스텔라 갈리시아 맥주와 함께 하는 저녁. 알베르게의 옥상 테이블에도 우리뿐이다. 긴 까미노를 걷는 어느 밤이 아닌 친구들과 근교 여행을 와서 보내는 즐겁고 시끌벅적한 밤 같다.
잠을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밖에 나가서 한참을 들어오지 않던 도영이 고민을 들어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희정과 도영이 심각한 표정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희정과 이탈리아 남자와의 고민이었다. 짧은 시간에 가까워진 두 사람이 여러 이해가 맞지 않아 문제가 생겨났다. "잠시 따로 걸으면서 시간을 가져보자." 서로의 해결방안을 이야기해 본다. 이 먼 곳에 와서 연애 상담을 하게 될 줄이야. 한국인 2,3,40대가 스페인 시골마을에서 머리를 맞대고 연애 솔루션을 찾고 있는 아이러니한 모습.
너무 뜨거운 커플의 충격적인 소식으로 시작해 조금 차가워지고 싶은 커플의 고민으로 마무리하는 하루다. 그러고 보니 노처녀는 속도 없이 날씨나 좋다고 좋아했네. 순례길이 하이라이트 지점에 이르니 사랑도 무르는다. 너무 핫한 길이다.
내일 날씨도 여전히 핫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