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30 사리아 → 포르토마린
2025.7.30 (Wed) | 28° | 8:50~17:40 (8h 50m) | 22km
분명 깜깜할 때 잠이 깼던 것 같은데 다시 눈을 떠보니 환한 아침이다. 이제 늦은 기상이 놀랍지도 않다. 앰버가 울상이라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개미가 꼬여서 배낭에 들어갔단다. 가까이 가보니 신기하게 그 주변에만 개미가 가득하다. 맥주값 덤탱이부터 눈뜨자마자 개미 어택까지. 앰버와 제임스는 기분이 상하다 못해 질려버린 듯했다.
어제까진 출발 시간이 늦으면 길이 한산 했는데 오늘은 9시에도 순례길을 걸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기대에 찬 얼굴과 새하얀 피부, 깨끗한 운동화와 배낭. 사리아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북적북적하고 시끌벅적한 길의 곳곳에 왁스 스탬프를 찍어 준다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도장을 받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들린 바는 기념품 가게인지 식당인지 헷갈릴 정도다. 작은 마을의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기념품 가게가 보였다. 하루 사이에 달리진 풍경에 기분이 묘했다.
6명이 함께 출발했지만 정신없는 길에서 흩어져 걷다 한시쯤 어느 바에서 다시 만났다. 다들 바뀐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는 눈치다. 콜라를 한 캔 사서 마시고 짊어지고 온 오렌지 주스를 마저 따라 마셨다. 다 마신 주스병을 버리려고 쓰레기통을 찾으니 종업원이 단호하게 안된다며 들고 가라고 한다. 여기서 팔지 않는 것을 버리지 말라는 것. 야박한 인심에 당황스럽지만 바뀐 분위기에 적응을 해야지 별 수 있나. 초반보다 조금은 한산해진 길을 함께 걷다 보니 어느새 100km 비석이 나타났다. 드디어 여기에 왔구나. 비석에 모여 단체 사진을 찍으며 이 순간을 기념했다. 기쁨을 나눌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길인데 너무 불평하지 말아야지.
뜨거운 햇볕에 지쳐 한참을 뒤쳐져서 걸었다. 그때마다 앞서가던 일행들이 어딘가에 멈춰서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내성적인 독신의 삶은 외롭게 혼자 걷는 길이다. 저만치 멀어진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도 없고 누구도 기다려주지도 않는 삶을 당연한 듯 살았다. 이렇게 나와 함께 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는 기분을 느껴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늘 누군가와 가까워져도 마음을 다 보여주지 못하고 한켠에 불안함이 있었는데 말도 잘 안 통하고 나이차이도 많은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편안한 걸까.
목적지인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도착했지만 숙소를 정하지 못했다. 근처 알베르게 몇 군데를 들러봤지만 이미 자리가 모두 차 있었다. 숙소를 못 정했다면 공립 알베르게로 가야지. 늦은 시간이라 침대가 얼마 남지 않아 6명이 간신히 체크인을 했다. 뒤이어 온 사람들이 발길을 돌렸으니 우리가 운이 좋았다. 이 동네에도 공공수영장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짐을 풀자마자 마틴, 이반, 도영과 먼저 도착해 있던 애덤까지 함께 찾아갔다. 이곳의 공공 수영장은 2유로를 내고 들어가는 야외 수영장이다. 둥둥 떠서 하늘을 보며 쉬고 싶지만 물이 더러워서 한 두 번 왔다 갔다 하고 곁에 앉아 몸을 말렸다. 한국 이런 동네 수영장이 있다면 아이들만 가득했겠지.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어제 뜯지도 못한 와인을 챙겨서 알베르게의 라운지에 모였다. 컵이나 그릇을 찾아보니 역시 아무것도 없다. 보통 알베르게에 기본적인 식기와 조리도구들이 있는데 이곳의 주방은 싱크대만 달랑 있다. 사리아 이후부터는 모든 공립 알베르게에서 조리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동네상권을 살리기 위해서라나. 아끼지 말고 돈을 팍팍 쓰라는 거다. 일곱 명이 둘러앉아 와인을 병째 돌려마시는데 별것 아닌 행동도 말도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실컷 웃다 보니 배가 다 아팠다. 10시가 되자 소등으로 주변이 깜깜해졌지만 아무도 자러 갈 생각이 없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무서운 얘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Chat GPT에게 물어본 무서운 이야기를 영어 선생님인 애덤이 차분히 읽어주고 이어서 제임스가 친구가 직접 겪은 마오리족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들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지만 영어를 잘 못하는 나는 이해하기에 바빠 몰입이 되지 않는다. 옆 테이블의 청소년 단체 무리와 우리들을 보고 있으니 꼭 고등학교 수학여행에 온 것만 같다. 순례길에서 회춘하게 될지는 몰랐네.
대학생인 도영이 수강신청 문제로 내일은 일찍 출발해 1시에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다. 잘 일어나지 못하는 도영을 깨워줘야겠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새벽 알람을 맞춰본다. 얼마만의 새벽기상인지.
내일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