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9 트리아카스텔라 → 사리아
2025.7.29 (Tue) | 26° | 9:00~15:30 (6h 30m) | 20km
오늘은 사리아(Sarria)로 가는 날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사람 중 30% 정도가 사리아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규정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지막 100Km 구간은 반드시 거쳐야 순례길 인증서가 나왔고 그 규정을 지키려면 사리아(115Km)에서 출발을 해야 했다. 바뀐 규정(어디든 100Km 이상)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리아부터 산티아고까지를 필수코스로 여기고 있다. 그 말인즉 사리아부터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난다는 것. 여유 있게 걸어도 5일이면 마칠 수 있어서 휴가가 짧거나 긴 거리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코스였다.
짐을 싸면서 다들 오늘 어디까지 갈 것인지 이야기했다. 사리아부터 숙소 잡기가 힘들고 단체 관광객 때문에 힘들다는 후기를 보아서 나는 메인 경유지 보다 한 마을씩 더 가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제임스와 앰버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고 도영은 사리아로 가겠다고 했다. 전부터 자기는 무조건 까미노 닌자(까미노 앱)에서 제시하는 메인 코스대로 걷는다고 했었는데 그 마음이 여전한 듯했다. 정석대로 해내겠다는 고집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원래 계획을 지키고 싶지만 마지막에 혼자 걷고 싶지 않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귈 마음도 없었고 이 그룹이 갈라진다면 맘 편한 도영과 가고 싶었다. 그렇게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출발.
늦은 출발에 마을이 한산하다. 늦은 김에 건너편 바에서 다 함께 아침을 먹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틴의 작명이 너무 탁월했다. 우린 정말 Always Late.. 오늘은 출발지부터 두 갈래 길로 나뉜다. 더 짧지만 오르막이 있는 산실 길과 7km 더 길지만 풍경이 좋고 수도원을 거쳐가는 사모스길. 나와 제임스, 앰버는 산실을 택하고 마틴과 이안, 도영은 사모스 길을 택했다. 양쪽 방향이 새겨진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놓인 곳에서 두 그룹이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제임스는 충분히 긴 길을 걸을 수 있지만 아직 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앰버를 배려해 짧은 길을 선택했다. 뉴질랜드에서 사냥도, 하이킹도 많이 다닌다는 제임스에게 순례길은 동내 산책이나 다름없었다. 한 번쯤은 자기 페이스대로 치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할 텐데 늘 앰버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 물어보니 가족들끼리도 모두 알고 있는 고향친구라고 했다. "그럼 너희는 어린 시절 추억이 똑같겠네." "맞아!"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도 제임스가 앰버를 볼 때면 눈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제임스는 모두에게 친절했지만 앰버에게 가장 친절했고, 내향적인 앰버도 외향적인 제임스를 또 그대로 잘 맞춰 주었다. 이상적인 커플이었다. "나도 너희처럼 커플로 세계여행을 다니는 게 꿈이었어." "정말?! 지금이라도 찾아보자!" "아니아니 예전에, 지금은 아니야." 혹시라도 남자를 찾는 걸로 오해할까 봐 황급히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다. "혼자도 충분히 행복하지?" "그럼! 당연하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중년의 솔로 마냥 대답을 했지만 사실 혼자가 편하긴 한데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다. 워낙 혼자 다니는 걸 좋아했고 어릴 땐 그런 게 쿨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육아를 하는 친구들, 삶의 결이 달라진 지인들, 일로 만난 사이를 빼고 나니 곁에 남는 사람이 없다. 이 나이에 혼자 덩그라니 남겨지니 조금은 쓸쓸한 게 솔직한 마음이다. 멋지게 나이를 먹었다면 여전히 쿨 했겠지.
초반에 속도를 내는 패턴대로 걷다 보니 혼자 앞서게 됐다. 수도원을 거쳐가는 길의 풍경이 훨씬 좋다는 후기를 보아서 내가 걷는 길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는데 중간에 만난 비석에 이 길이 훨씬 낫다고 쓰인 낙서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뭐가 더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너른 들판에 소도 있고 요가를 가르쳐 준다는 독특한 도네이션 알베르게도 있고 나름 볼거리가 있긴 했다. 한참 속도를 내다 힘이 떨어져 쉬엄쉬엄 걷다보니 앰버 커플과 다시 만났다. 둘은 순례자 여권에 그림을 그려주는 곳을 다녀왔다며 나를 계속 불렀지만 듣지 못하고 멀리 걸어갔다고 했다. 산실 코스에서 꼭 들려야 하는 곳이었는데 그걸 놓치다니.
1,2km도 아니고 7km나 짧은 길을 선택했으니 당연히 우리가 훨씬 먼저 사리아에 도착할 거라 생각했다. 두 길이 다시 합쳐지는 아구이아다(Aguiada)를 지나는데 마틴에게 지금 어디쯤이냐는 메시지가 왔다. 우리 셋이 아구이아다를 지나고 있다고 하니 곧 그곳에 도착하니 거기서 보자고 했다. 이렇게 빨리? 워낙 작은 마을이라 바는 없었고 무인 자판기가 여러 대 있는 매점 같은 곳의 간이 의자에 앉아 사모스팀을 기다렸다. 음료를 뽑아서 몇모금 마시고 나니 마틴과 도영이 뛰어들어오고 잠시 후 이안이 도착했다. 그들끼리 서로가 너무 빠르다며 어이없어했지만 내가 보기엔 셋 다 똑같이 기가 막혔다. 여기서 사리아까지는 5km 남짓. 느리게 걷는걸 힘들어하는 도영은 앞서 걷고 나머지 다섯은 무리를 지어 함께 걸었다. 함께 걷는다고 해도 내가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는 꼴이지만 그들의 원래 속도를 생각하면 같이 걸어주는 게 맞았다.
여전히 사리아에서 더 걸어갈 것인지 사리아에 멈출 것인지 결정을 못했다. 나는 다 같이 다음 마을로 갔으면 싶지만 더위에 지쳐서 그만 걷고 싶기도 했다. 시간은 벌써 3시가 훌쩍 넘었다. 전속력으로 달린 여파인지 함께 가자는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자연스럽게 사리아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6명이 같이 머물 곳이 있을까 싶었는데 운 좋게 한방에 가능한 숙소를 찾았다. 체크인을 하는데 주인아주머니가 퉁명스럽다. 관광지니 그럴 수 있지. 체크인이 끝나고 침대를 배정받아 커버를 씌우는데 아주머니가 불쑥 다가오더니 도영에게 옷을 침대에 놓지 말라며 신경질을 내셨다. 바람막이를 침대 사다리에 걸쳐놓은 건데 벼룩이라도 옮길 것처럼 질색을 했다. 커버를 씌운 베드에 지갑을 올려놓아도 그러지 말라며 호들갑이다. 서서 자라는 거야 뭐야. 그 뒤로도 방을 떠나지 않고 통화를 하는 척하며 우리를 지켜봤다. 순례자라면 모두가 환대해 주었는데 이런 취급은 처음이다. 마치 우리가 바이러스를 품고 온 전염병자가 된 것 같았다.
숙소 바로 앞에 바가 있어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늦은 점심이라 시원한 맥주와 든든한 햄버거를 주문했다. 주인아줌마 흉을 실컷 보고 있는데 같은 숙소에서 애덤이 나와 테이블에 함께 했다. 프랑스인인 그는 마틴과 구면이었고 나도 대화는 한적 없지만 여러 번 마주쳤었다. 애덤은 우리가 겪은 일을 듣고 자신에게는 파스까지 주면서 친절하게 대했다고 해서 기분이 더 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덤은 독방을 써서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 냈고 무슨 비법인지 옷도 깔끔하고 새것 같아서 오래 걸어온 순례자로 보이지 않았다.(실제로 부르고스에서 시작하기도 했다.) 지나가던 제임스와 친한 순례자가 잠시 합석을 했다 떠났고, 몇 잔의 술과 안주를 더 시키니 바 주인이 우리에게 농담도 하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그런 모습을 보던 숙소 주인이 다가와 우리에게도 애덤에게 줬다는 파스를 하나씩 건네주셨다. 괜히 오해했나. 기분 좋게 식사 자리를 마무리하고 각자 먹은 것을 차례로 계산했다. 마지막으로 계산을 하러 들어간 앰버 커플이 한참 있다 나오더니 술을 몇 잔을 먹었는지 물어본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자신들이 먹은 것보다 무려 30유로 가까이 더 지불을 했단다. 각자 먹은 것을 차례로 뺐는데도 맥주 숫자가 많이 남아 있던 것. 계산 실수라기엔 액수가 너무 컸다. 따지려고 들어가니 웃으며 이야기하던 아저씨는 정색하고 자신의 계산이 맞다고 했다. 보통 다른 곳은 계산서를 내주는데 그것도 없이 손으로 적은 메모지만 가르킨다. “라꾸엔따! 라꾸엔따!” 계산서를 달라고 큰소리를 내니 앰버가 들어와 이미 자신도 한참 이야기를 했는데 통하지 않는다며 괜찮다고 그냥 가지고 했다. 사리아 도착부터 이연타로 얻어맞아 정신이 혼미하다. 공짜 파스가 아니었네.
슈퍼에서 맥주와 와인을 잔뜩 사놓고 저녁에 애덤의 일인실에 모이기로 했다. 하지만 방을 구경하러 따라가는 도영과 이안이 주인에게 왜 그곳에 가냐고 추궁을 당했기 때문에 계획을 바로 포기했다. 근처 빨래방에서 빨래를 하고 돌아오니 결국 식당에 모여 한잔씩 하는 분위기다. 숙소에 머무는 새로운 순례자 두 명이 자리를 함께 해서 각자 하는 일부터 소개를 해야 했다. 무슨 심보인지 이제 새로운 사람과 맺어지는 게 피로해서 일을 그만둬서 찾아야 한다고만 말하고 그 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술을 잔뜩 마시지도 시끄럽게 웃고 떠든 것도 아닌데 주인아주머니가 나타나 "내가 10시 이후에는 주방에 있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지!" 신경질을 내며 쫓아냈다. 막 10시가 됐을때였다. 감시하기에 바빴지 숙소의 규칙이나 주의사항은 말해준 적도 없었다. 이제 불을 꺼야 한다 정도로 말해줘도 될 것을 우리도 손님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사리아에 오니 오래 걸어온 순례자는 베드버그를 옮기는 골치 아픈 사람들이고 새로운 순례자는 돈을 많이 쓰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사리아부터 시작하는 사람들과 생장에서 출발한 사람들을 구분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이런 대접을 받고 나니 저절로 그들을 구분짓게 된다.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걸어왔는데 남은 5일을 이런 취급을 받으며 걸어야 한다니.
사리아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진다더니..
과연 이것이 사리야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숙소 사진을 안(못) 찍어서 오늘의 침대 사진은 없습니다. 숙소 이름 또한 밝히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