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언덕에서 노을

Day27 빌라프랑카 델 비에르조→오 세브레이로

by 게으른여름

2025.7.27 (Sun) | 30° | 7:40~5:30 (9h 50m) | 26.8km



어제 맥주로 고생했던 것치고는 다행히 숙취 없이 깨어났다. 저녁도 굶고 일찍 잠에 들었건만 눈 뜨는 시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비슷하다. 아무래도 레온 이후로 긴장이 사라진 것 같다. 여유로운 몸과 다르게 마음은 늘 조급하다. 이 와중에 출입문이 두 개라 동키를 보낼 가방을 어디 둘지 몰라 난감했다. 관리자는 상주하지 않았고 물어볼 다른 순례자도 없었다. 두 출입문 사이 계단을 배낭을 메고 몇 번을 오갔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적당한 곳에 두고 동키 회사 담당자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잠시 후 받은 커다란 엄지 이모티콘 답장. 이 정도면 내 가방을 빼먹진 않겠지.



오늘도 등산을 하는 날이다. 500m 고도에서 시작해 목적지인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1300m까지 올라가야 한다. 5km 거리의 페레헤(Pereje)까지는 약하게 경사진 차도 옆을 따라가는 단조로운 길이었다. 첫 마을이라 그런지 바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도 나폴리타나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먼저 도착해 있던 앰버 커플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앰버의 발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갑자기 생긴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계속 걷는 게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인싸 커플답게 모두가 다가와 걱정과 조언을 한 마디씩 해주며 떠난다. 까미노를 포기하려는 줄 알고 계속 같이 걷고 싶다고 울 것처럼 말하니 정 안 되면 택시를 탈거라며 괜찮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준다. 시작을 함께 했으니 마지막까지 함께 잘 끝냈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계속 잘 닦여진 포장도로를 걷는 코스였다. 산골짜기 마을들이라 이전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풍경이다. 암바스메스타스(Ambasmestas)를 지나는데 카페 인지 알베르게 인지 어느 집 앞에 앉아 쉬는 이안과 마주쳤다. 반갑기도 하고 마침 쉬고 싶던 차라 나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콜라를 구매하려고 들어가 둘러본 집은 독특한 오브제들과 인테리어로 보아 평범한 공간은 아닌 듯했다. 분위기가 멋지다며 감탄하는 내게 백발 아저씨가 다가오셨다. 그는 자신이 이곳의 오너라고 했다. "여기 너무 멋있어요. 이런 곳이 있는 걸 알았다면 여기에 머물렀을 거예요" 진담반 칭찬반 섞인 멘트를 날리자 아저씨는 나의 명치를 꾹 누르며 이곳에서 느끼는 대로 하라고 하신다. 그루의 가르침 마냥 단호한 말투였다. 멋진 알베르게는 맞지만 오늘의 목적지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하나 생각하는 내 모습을 고민하는 걸로 오해하시고 재차 이곳에서 느끼는 대로 하라며 명치를 찌르셨다. "하하.. 저는 가야 해요.." 명치를 쓰다듬으며 쭈뼛거리는데 뒤늦게 마틴이 도착했다. 지금은 이 둘과 함께 걷는 게 내 마음이 원하는 일이다.



그렇게 셋이 함께 걷다가, 둘이 걷다가, 혼자 걷다가 다시 만나서 함께 걷기를 반복하다 라스 헤레리아스(Las Herrerías)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서부터 남은 7km는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마을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스팔트 길이 끊기고 흙길이 시작됐다. 이제 등산이구나. 가뜩이나 느린 걸음이 더 느려졌다. 중력의 힘을 10배는 더 받는 기분이다. 한참 올라온 것 같은데 30분밖에 지나지 않았고 눈앞에는 정상까지 아직 멀었다는 한글 낙서가 나타났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도 아니고 아직 멀었다고? 이 상태로 오 세브레이로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을 때쯤 라 파바(La Faba)에 도착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마틴과 이안은 오늘 오 세브레이로까지 가고 내일부터는 40Km씩 걸어 나흘 안에 까미노를 마칠 거라고 했다. 사실 둘은 걷는 속도가 빨라서 멀리 가려면 진작 더 갈 수도 있었다. 걷다가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하다 보니 계획대로 가지 못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 남은 거리를 몰아서 걷게 된 듯 보였다. 둘 다 다음 여행이 계획되어 있어 일정이 빠듯해 보였다.



오늘의 풍경도 피레네를 오를 때와 철의 십자가를 내려올 때만큼이나 장관이었다. 몇 년 치 초록을 이 길에서 다 보고 가는 것 같다. 앞서 걷던 마틴이 길가의 나무 열매를 따서 먹으라며 나눠줬다. "먹을 수 있는 거야?" "먹어도 돼. 엄청 달아." 도시에 사는데 이런 걸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니 시골 할머니의 가든에서 많이 따서 먹었단다. 벌레 먹은 복숭아를 먹으면 미인이 된다는데 벌레 붙은 베리도 먹으면 미인이 될까. 맛이 있긴 했지만 왠지 사이사이 벌레가 박혀있는 기분이라 계속 건네주는 마틴에게 목이 마르다고 에둘러서 거절했다.



오 세브레이로가 가까워오자 갈리시아(Galicia) 비석이 등장했다. 여기서부터는 갈리시아 지방이다. 산티아고가 가까워졌다는게 실감 됐다. 오 세브레이로는 원주민이 사는 마을이라기보다 성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관광지였다. 마을 입구엔 기념품점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숙박 시설들의 가격도 높았다. 14세기 경 이곳의 성당에서 미사 도중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흔적이 성당에 남아 있고 과학적으로도 진실로 밝혀졌다고 했다. 그냥 하는 얘기겠지 하면서도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싶기도 했다. 숙박비가 비싼 이곳에선 고민도 없이 10유로짜리 공립 알베르게다. 알베르게는 마을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카페를 열면 대박이 날 것 같은 뷰 맛집이었다. 큰 건물에 침실은 하나, 100여 명이 한방에서 함께 자는 구조였다.



저녁 식사 전 성당에 방문했다. 저녁엔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있다. 지금까지 봐왔던 성당들은 규모가 작아도 금칠이 된 화려한 장식이 벽을 가득 채웠었다. 이곳은 투박한 벽돌로 지어진 미사여구 없는 담백한 그냥 '성당'이었다. 미사 진행도 굉장히 캐주얼했다. 파이프오르간이 아닌 미디반주 같은 성가곡이 스피커로 흘러나오고, 신부님은 제단에서 내려와 큰소리로 성가곡을 따라 부르시며 순례자들 한 명 한 명에게 성수를 뿌려주셨다. 여러 가지로 반전의 성당이다.



저녁을 먹기 위해 앰버 커플과 마틴, 이안, 도영, 다른 숙소에 묵고 있는 희정 커플까지 8명이 모였다. 나는 미사가 끝났다고 생각해 일찍 나왔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 뒤에 나라별로 한사람씩 불러 세워 자국어로 기도문을 읽게 했고 마지막엔 참석자 모두에게 화살표가 그려진 돌멩이를 하나씩 나눠 주셨다고 했다. 돌멩이를 받지 못한 내가 아쉬워하니 앰버가 본인들은 두 개가 있으니 하나를 가지라며 자기 것을 건네주었다. "진짜?!" 좋다고 넙죽 받았다가 순간 카톨릭인 그들과 나에게 돌의 의미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다고 돌려주니 자기도 정말 괜찮다고 이건 네 것이라며 내 손에 쥐어준다. 내려놓은 돌멩이는 없고 짊어지는 돌멩이만 욕심처럼 늘어났다.


저녁을 먹고 돌아서니 노을이 예쁘게 지고 있었다. 경치 좋은 알베르게 앞으로 자리를 옮겨 다 함께 노을을 감상했다. 오늘은 손꼽히게 힘든 날이었지만 그 힘든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 이 산을 내려가면 산티아고까지 다시 올라가는 길은 없다. 벅찬 마음으로 노을을 바라보다 지금 이 순간이 이 길의 하이라이트구나 깨달았다. 내 인생의 마지막 언덕에서 석양을 맞이하는 날도 오늘처럼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끝내주는 경치를 보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었으면. 그렇게만 살아도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숙소로 올라가면서 마틴이 이안에게 나와 도영, 앰버 커플과 다 같이 산티아고로 들어가자고 했다. 서둘러 걸으려던 계획을 접은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알겠다고 하자 마틴은 비행기 티켓을 바꾸겠다고 했다.

마틴은 이 길을 빨리 끝내기가 아쉬웠던 걸까. 이 밤을 마지막으로 우리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걸까.

나에겐 둘 다 아쉬운 밤이었다.

뭐가 됐든, 내일도 웃으며 잘 걸어보자.



오늘의 침대 <Albergue de peregrinos de Ocebreiro de la Xunta de Galic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