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0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 레온
2025.7.20 (Sun) | 24° | 5:50~ 14:50 (9h 00m) | 30.9km (+37Km)
오늘은 목적지를 몰라서 배낭을 메고 걷는다. 레온까지 걸어서 가려면 3일은 더 필요한데 산티아고 이후에 포르투갈 여행 일정도 여유 있게 잡고 싶고 레온이랑 산티아고에서 연박을 하고 싶어서 약간의 점프로 남은 일정을 조금씩 당겨볼까 한다. 부르고스 이후 그러니까 메세타에 접어들면서 순례자 사무실에서 추천해 준(순례자 사무실에서는 일정표를 프린트해서 나눠준다) 일정대로 걸었는데 그것보다 한두 마을씩 더 가서 하루 이틀을 당기는 게 좋았을 것 같다. 길도 쉽고 볼거리도 크게 없는데 그렇게 해서 이 구간을 적당히 지루해지기 전에 빠져나왔으면 좋았으련만.
머물렀던 동네를 벗어나 밭 사이 길로 들어섰는데 비가 갑자기 세차게 내린다. 우비는 필요하면 현지에서 사려고 준비를 안 해왔는데 그동안 보슬비 정도만 잠깐씩 맞아서 우비가 필요 없었다. 오늘 비는 양이 꽤 된다. 당황스럽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그냥 배낭 커버에 바람막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걸어보기로 했다. 비가 앞을 가려 깜깜한 길이 더욱 어둡다. 손전등도 없고 비 때문에 핸드폰 플래시를 켜기도 애매했는데 앞에 가는 사람이 손전등을 꺼내 들어서 살짝 뒤로 따라붙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날이 밝고 비도 잦아들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마을을 통과해 걷는 길과 마을 바깥 차도를 따라 걷는 갈림길이다. 나는 차도를 따라 걷는 길을 택했다. 오후가 되면 걷는 속도가 나지 않기 때문에 오전엔 쭉쭉 치고 나가야 한다. 새벽이라 차들이 빨리 달릴 듯해 조심스러웠는데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이 길이 원래 그런 건지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다. 대신 도로 위엔 새떼가 있었다. 새들에게는 익숙한 원래 그들의 영역인 듯 보였다. 그 사이를 뚫고 가려니 히치콕 '새'의 새떼 공격씬이 떠올라 공포스러웠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도 해바라기 밭을 만났다. 아무래도 이 지역의 특산품이 해바라기인 것 같다. 어제 본 밭도 정말 컸는데 오늘은 그것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이렇게 광활한 해바라기 밭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끝없는 노란 지평선이 아름답고 낯설다. 까미노 초반에는 남은 거리가 새겨진 비석이 거의 없었고 간간이 나타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얼마나 거리가 줄어가는지 체크해 보게 된다. 어제 400km 비석을 만났으니 이제 300km대로 들어섰다. 걸어온 거리가 남은 거리보다 많다. 3주가 이렇게 빨리 지나가다니. 출발지인 생장이 까마득한 옛날 같다.
사하군(Sahagún)은 생각보다 큰 마을 아니, 도시였다. 기차역도 있고 마을 입구부터 다양한 순례자 벽화들이 그려진 까미노에 진심인 곳이었다. 이곳에서 순례길 절반 인증서를 발행해 준다고 하는데 사실 산티아고 인증서도 그때뿐이지 살면서 잘 꺼내 보지 않아서 그것까지는 받지 않기로 했다. 앞서 걷던 준호가 사하군의 바를 추천해 주어서 그곳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가기로 했다. 도착해 보니 준호는 벌써 출발했고 그 뒤로 걷던 태훈이 중국인 순례자와 함께 아침을 먹고 있었다. 진열을 먹음직스럽게 해 놓은 건지 10km 넘게 걸어와서 당이 떨어져서 그런 건지 평소에 먹지도 않는 단 빵이 너무 당겨서 크림과 설탕시럽이 잔뜩 발라진 빵을 커피와 함께 시켰다. 강렬한 단맛은 혈당도 기분도 올려주었지만 마지막엔 너무 달아서 속이 다 매슥거렸다. 울렁대는 속을 달래며 다시 태훈과 길을 나선다.
오늘 어디까지 든 걸어가서 그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 버스로 레온으로 떠나려 했지만, 찾아보니 기차를 타면 오늘 바로 레온으로 떠나는 것도 가능했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추천해 준 일정표는 베르시아노스(Bercianos)까지 23km를 걷는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레온으로 가는 버스는 오전에만 있다. 지금 사하군에서 기차를 탈 수도 있지만 12km 정도의 짧은 거리만 걷는 건 내키지 않았다. 아니면 베르시아노스 다음 마을인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까지 7km를 더 걸어가야 한다. 답이 안 나와서 일단 베르시아노스까지 걸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프랑스길은 갈림길 천국이다. 수많은 갈림길이 꼭 인생 같다. 평소처럼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비교 선택 할 시간이 없으니 나름 기준을 정했다. 짧은 길이 우선이고, 다음으로는 꼭 봐야 하는 게 있다거나 알베르게가 더 많은 곳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하군 다음 마을인 칼사다 델 코토(Calzada del Coto)부터 만시야(Mansilla)까지 30여 km는 서로 전혀 다른 마을을 걸어야 하는 갈림길이다. 오늘은 버스나 기차를 탈 수 있는 길을 선택해서 걷기로 했다.
베르시아노스가 가까워서도 결정을 못하고 고민을 하고 있으니 함께 걷던 태훈이 기차를 탈 수 있는 엘 부르고 라네로까지 7km 더 걸어가 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 말에 해볼까 하는 용기가 생겼다. 30km를 걸은 날은 많지만 배낭을 온전히 메고 걷는 건 처음이다. 막연한 응원보다는 함께 해보자는 지지가 나를 더 걷게 했다. 태훈은 들뜨지 않고 항상 차분히 이야기하지만 말에 힘이 있었다. 심리학을 공부중인 그가 나중에 분명 좋은 상담가가 될 거라 생각했다.
엘 부르고 라네로에 도착했을 때가 2:30 쯤이었다. 태훈은 알베르게로 가고 나는 근처에서 식사 후에 5:55 기차를 타고 떠나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남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곳에 라면을 파는 가게가 있다는 후기를 보고 찾아가보니 시에스타라 문을 닫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한식 파는 곳이랑 인연이 왜이리 없는걸까. 밥을 포기하고 길가의 벤치에 앉아 쉬다가 체크인을 마친 태훈을 다시만나 시에스타 없이 장사 중인 바의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아침에 만났던 중국 순례자가 걸어 오는 것이 보여 다시 만난 김에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녀의 스틱이 예뻐서 며칠간 눈여겨보던 중이라 브랜드가 궁금했다. 친구에게 선물을 받은 거라며 흔쾌히 사진을 찍으라고 브랜드를 보여준다. 호의적이라 내친김에 호 아저씨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혹시 그분의 영상 계정을 알고 있냐고 물었더니 아저씨는 은퇴한 저널리스트이고 개인 계정에 영상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중국 매체에 자신이 찍은 것을 보내서 연재 중이라 했다. 역시! 반전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위챗을 알려주며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 달라며 떠났지만 이로써 궁금증은 모두 풀렸다.
엘 부르고 기차역은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작은 간이역이었다. 안내판도 없어서 어느 방향이 레온행 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차가 도착한 후 철길을 건널 수도 없고.. 예상되는 플랫폼에서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차 도착 시간쯤 현지인 아줌마 한 분이 오셔서 레온? 하고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며칠 걷기만 하다 버스를 탔을 때는 순간 이동 하는 것처럼 기분이 묘했는데 훨씬 빠른 기차를 타니 오히려 체감이 되지 않는다. 레온에서 발바닥 치료나 받을까 해서 한의원을 검색해 보니 진료비가 1~20만 원 정도였다. 예상보다 가격이 비싸고 침 한 번에 나을 상태는 아닌 것 같으니 그냥 스트레칭이나 꾸준히 하는 것으로.
37km가 기차로는 겨우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레온은 순례길에서 만나는 4번째 대도시이다. 도시마다 느낌이 모두 다르다. 팜플로나가 좋았는데 로그로뇨가 더 좋았고 로그로뇨가 좋았지만 부르고스가 더 좋았는데 레온에 와보니 레온이 가장 좋더라. 오는 길에 숙소를 예약했는데 특가 상품이라 가격도 저렴하고 대성당에서 넘어지면 도착할 거리라서 마음에 들었다. 에어컨도 빵빵하고 수건을 제공해 주는 데다 세탁기, 건조기 사용도 공짜였다. 레온에 숙소가 너무 많아서 비교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는데 잘한 선택이었다.
레온에서도 시티투어버스로 도시를 둘러 보기로 했다. 꼬마기차처럼 생긴 버스는 가우디 건물로 유명한 보테니스 저택 건너편에서 출발한다. 큰길뿐 아니라 골목골목을 다니며 레온에서 꼭 봐야 하는 장소들, 성곽부터 시청, 호텔(구 수도원) 등을 소개하는 알찬 코스였다. 지나면서 마주치는 현지인들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는게 놀라웠다. 투어버스가 하루에 한두 번도 아니고 매시간마다 다니는데 이렇게 호의적이라니. 슈퍼 내향인인 나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게 만든 레온 사람들. 레온에 대한 호감 지수가 급 상승한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가 한식과 일식을 함께 파는 곳이 보여 들어갔다. 금발 외국인 직원이 메뉴를 펼치더니 내게 한식 메뉴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그는 알고 있을까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돌솥비빔밥을 시켰더니 밥을 가져다주고는 그 자리에서 숫가락 두개로 열심히 밥을 비벼줬다. 처음 겪는 신기한 모습이라 영상까지 찍었다. 한국은 비싼 한정식집을 가도 안 비벼 주는데.. 앞접시를 내주며 뜨거우니 덜어먹으라고 안내한다. 친절함에 반해 안 먹으려던 음료수까지 시켜버렸다.
숙소에 돌아와 내일은 뭘 해야 하나 거실 소파에 앉아서 폰을 보고 있는데 어제 사하군으로 간다던 짧은 머리 청년이 방에서 나오면서 나를 보고 놀라 인사한다. 거의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조금 전 도착했다고 했다. 캠핑을 하고 싶었는데 텐트를 친 곳이 금지 구역이라 쫓겨나서 밤중에 레온까지 걸어오게 됐단다. 오밤중에 걸어온 게 대책 없으면서 대단하기도 하고 레온에 그 많은 숙소들 중에 만난 게 신기하기도 했다. 저녁을 못 먹었다길래 내가 가지고 있던 납작 복숭아랑 나티야스를 주니까 거절도 안 하고 다 받아서 먹는다. 그동안 통성명도 안했는데 이름이 도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이를 물어 알려주니 그보다 열살은 더 어린 줄 알았단다. 아마도 같이 다닌 친구들이 어렸어서 이렇게까지 나이가 많을 줄은 몰랐던것 같다. 어린 사람이 어리게 봐주니 좋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 나이가 달라지진 않지.
길게 걷고 기차를 타고 투어까지 한 알차고 긴 하루였다. 그리고 내일은 늦잠을 자도 된다. 그동안 누가 뭐라 하지는 않지만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모처럼 실컷 잘 수 있어서 벌써 모든 긴장이 풀어진다.
내일의 꿀 같은 휴일을 기대하며, 굳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