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9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2025.7.19 (Sat) | 25° | 6:10~13:20 (7h 10m) | 27.6km
까리온의 공립 알베르게는 다른 알베르게 침대 밀집도의 2~30% 정도밖에 수용하지 않는다. 그 덕에 너무 쾌적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고온에 숨이 막혔는데 오늘은 그나마 기온이 내려가는 듯하다. 길을 나서니 동이 트기 전 짙은 하늘에 귀여운 달이 콕 큐빅처럼 박혀있다. 깜깜할 때에는 쏟아질듯한 별을 볼 수 있다는데. 나는 언제 별을 볼 수 있을까.
오늘은 조금 긴장하면서 출발했다. 첫 마을까지 거리가 17km고 그 사이에 쉴 곳이 푸드트럭 한 곳 밖에 없다고 들어서이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해바라기 밭이 나왔다. 그동안 해바라기 밭이 많이 있었지만 오늘은 그것의 몇 배나 되는 크기였다. '해바라기유가 여기서 오는 걸까. 나중에 마트에 가면 원산지를 봐야겠다.' 같은 생각을 하며 해바라기 밭을 지나다 뒤에서 걸어오던 태훈을 만났다. 태훈은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결정적인 장면만 아껴서 촬영을 했다. 아마 이 밭에서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노란 지평선과 핑크빛 하늘의 풍경이 예뻐서 걷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동키를 보내서 작은 백팩을 멘 초라한 뒷모습 때문에 배경만큼 그럴 싸한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배낭을 멨어야 했는데.
오늘도 호 아저씨를 만났다. 중국인인 호 아저씨는 영어를 나보다 더 못해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순 없었고 단지 이름이 호라는 것만 알고 있다. 작은 키에 본인 키의 절반보다 큰 배낭을 메고 고프로를 들고 다녔는데 항상 반대 손에는 봉다리가 들려있었다. 눈에 띄는 행색은 궁금증을 일으켰다. 나는 '이 아저씨 반전이 있을 것 같다. 왠지 도우인이나 샤오홍슈 같은데 팔로워 수십만 명 일 것 같다.'고 말하곤했다. 한 번은 궁금함을 못 참고 너의 비디오를 몇 명이 보냐고 물어보니 손짓으로 아주 작다고 대답했다. 반전이 없었다니..
이전에 팜플로나 가는 길에 경찰에게 쎄요를 받았던 것이 특별한 경험이라 각 지역 경찰의 도장을 받고 싶었지만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경찰차가 순례길 한가운데 딱 세워져 있길래 도장 찍어주러 왔구나! 반가워서 태훈에게도 같이 도장을 받자고 권했다. 다가가서 크레덴셜을 내미니 여권을 보여달란다. 순례자 불심검문 인가. 여권을 가져가서 사진을 찍고는 돌려준다. 그러고도 이유도 모른 채 한참 잡혀있었는데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은 붙잡지도 않는다. 이럴 거면 도장받지 말걸.. 찝찝해서 경찰차에 그려진 로고를 검색해 보니 경찰이 맞긴 하던데. 비포장 흙길을 경찰차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왔다 갔다 해서 참 가지가지 한다 싶었다.
경찰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준호와 지성이 뒤따라와 다시 넷이 함께 걷게됐다. 한참 걷다보니 푸드트럭이 나타났다. 유일한 휴식 공간이다 보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들렀다. 주문이 끝없이 들어오는데 한명이 주문에 요리까지 척척척이다. 이런 식이면 돈을 정말 많이 벌 것 같은데 어떻게 이 자리를 선점하게 된 건지. 왜 이 옆에 다른 사람이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인지. 한국이라면 원조 푸드트럭과 진짜 원조 푸드트럭이 경쟁을 했겠지. 식사를 다 마쳐가는데 뉴질랜드에서 오신 한국 어르신 일행을 만났다. 반가워서 인사를 드리니 '이제 못 만날 것 같다. 우리는 이제 천천히 걸어갈 거다.'라고 하신다. 건강하게 조심히 걸어오세요.
푸드트럭을 나와 두 시간쯤 더 걸어가니 드디어 첫 마을이 나왔다. 마을 초입에 바가 바로 자리하고 있어서 다시 또 들른다. 두 시간마다 쉬고 있는 셈이다. 그늘도 없고 더위에 갈증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콜라 한 캔씩 마시면서 쉬는데 옆 테이블에 어제 중국인으로 착각했던 짧은 머리 청년이 앉았다. 우리보다 10여 키로를 더 간다고 들었는데 여유로워서 사하군 가는 거 맞냐고 물어보니 맞단다. 하긴 나도 남들보다 늦게 걷는 날이 허다하니 남 걱정 할 처지는 아니지.
어제의 날씨도 맑고 하늘에 뭉실뭉실 구름이 예뻤는데 오늘도 그림책 같은 예쁜 하늘을 만났다. 마그리트나 달리 그림의 한 폭 같은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오늘 가는 마을 이름이 제일 어렵다.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오늘은 사립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했다. 마을에 알베르게가 단 두 곳인데 공립은 마을에 들어서기 한참 전에 위치해 마을 안에 있는 사립 알베르게로 가기로 했다. 예약을 하며 나머지 세명에게도 같이 예약을 해줄지 물어보니 좋다고 한다. 4명을 예약했더니 도미토리가 아닌 방 하나를 통으로 쓰라고 줬다. 샤워실은 층별로 공통으로 쓰고 빨래는 마당에서 하는데 특이하게 버튼을 손으로 누르고 있어야 물이 나왔다. 얼음같은 찬 물이 나와 처음엔 시원하다고 좋아했다가 나중에는 손이 시려서 겨우 빨래를 마쳤다.
숙소의 식당에서 네명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셋과 함께 걸으면서 즐겁고 좋은 추억도 많이 쌓았지만 레온에서 연박을 하고 싶어 졌고, 어린 친구들이 어쩌다 일정이 같아서 연령대도 성별도 다른 나와 다니고 있지만 불편할 것 같다는 마음도 들었다. 해서 내일까지만 메세타를 걷고 레온으로 점프하려고 한다. 배려심이 몸에 밴 준호와 조곤조곤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태훈, 묵묵하게 함께해 준 지성이 고마워서 저녁을 산다고 했다. 같은 여행자 입장에서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멋진 추억을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어른으로서 이 정도는 살만하지!'라고 곧 백수지만 허세를 부려보았다. 정말 살면서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식사 후에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 돌아와서, 맨날 일찍 출발한다고 하고 한 번도 그 시간에 가지 않는다고 놀림을 받는 처지지만 내일은 진짜 진짜 일찍 일어나야지 다짐하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나도 별을 보면서 출발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