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알베르게를 만나면 기분이 조크든요

Day18 프로미스타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by 게으른여름

2025.7.18 (Fri) | 29° | 6:40~12:00 (5h 20m) | 18km


스페인 북쪽의 여름은 낮에는 불가마, 밤에는 아이스방을 오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지난밤은 달랐다. 마치 한국의 열대야처럼 늦도록 열기가 식지 않아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추위를 굉장히 많이 타는 편임에도 짐을 줄여본다고 침낭이 아닌 침낭 라이너를 가지고 나왔다. 여러 날 밤 나의 선택을 후회했는데 어제는 라이너도 걷어낼 정도로 더웠다.


건너편 침대의 가족들이 짐을 싸는 소리에 잠이 깼다. 2주 넘게 걸으며 생긴 나의 아침 루틴은, 잠이 깨면 침대에 앉아 발목에 스포츠테이프를 붙이고 발가락 양말과 양모 양말을 겹쳐 신고 침낭 라이너를 접는다. 충전기나 다른 밖에 나와있는 짐들을 다시 패킹하고 욕실용품 파우치를 챙겨 들고 화장실로 이동해 세수를 하고 렌즈를 끼고 로션을 바른다. 침대로 돌아가 늘어진 파우치들을 가방에 차곡차곡 쌓아서 넣고 바람막이와 무릎 보호대를 착용한 뒤 배낭을 메고(혹은 동키 맡기는 곳에 놓고) 신발을 신고 스틱을 찾아 떠난다. 다음날 입을 옷은 전날 자기 전 갈아입고 자고 아침엔 쌀쌀해서 꼭 긴팔 바람막이를 입고 출발한다. 생각이 필요 없는 심플한 루틴이다. 나의 진짜 일상에선 이런 반복된 행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은 비슷한 듯 달랐다. 지금의 이런 정해진 일과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준다.


오늘은 18km만 걸으면 돼서 부담이 적다. 여유롭게 동네 바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출발. 혼자 걷기 시작했지만 한 시간쯤 후 어제 함께 걷던 동생들을 만났다. 목적지도 같아서 오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넷이 함께 걷는다. 계속 차도 옆을 지나는 길이 이어져 단조롭고 볼거리가 적었다. 어제 식사를 함께 했던 스페인 할아버지를 길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했는데 일행이 있을 때는 평범한 대화를 하다가 둘이 있을 때면 나에게 "너의 눈이 너무 예쁘다.", "네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등등 칭찬 폭격이다. 순간 나의 자존감을 올려주기 위해 나타난 천사인가 생각했다가 천사라고 하기엔 불편한 스킨십과 과장된 칭찬이 부담스러웠다. 칭찬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애매하고 '하하하..'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여튼 불편해서 이후로는 할아버지를 피하기로 했다.


12시쯤 목적지인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Carrion de los Condes)에 도착했다. 오늘은 공립 알베르게로 간다. 지금까지의 최고의 숙소는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였는데 오늘 그 자리를 까리온 공립 알베르게가 쟁취해 버렸다. 연식은 조금 된 건물이지만 관리가 무척 잘 되어 있었다. 침실은 성별로 방을 나눠서 배정하고 모두에게 싱글 침대와 짐을 올려둘 개인 의자를 하나씩 제공해 주었다. 서른 명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방을 8명만 쓰려니 황송했다. 10유로에 이런 컨디션을 누릴 수 있다니. 누군지 모를 독지가에게 감사함을 보낸다. 기부금이 아니고 정부 지원금이려나.


스페인 할아버지는 와츠앱으로 본인은 어디 알베르게에 있다. 너희들은 어디냐. 지금 여기서는 다 함께 노래를 하고 있다 메시지를 계속 보냈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고 싶지 않아 답장은 내일 보내기로 했다. 알베르게에서 어제 만난 신학대 친구들을 또 만났다. 이들은 내일 40Km 가까이 걸어야 하는 사하군(Sahagun)으로 간다고 했다. 이 더위에 40km라니. 나도 한 번쯤 극한의 걷기를 해보고 가야 할까 싶다가도 내겐 지금이 이미 극한의 걷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걷는 것만큼 힘든 손빨래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까까머리 동양인 남자가 앉아 있어 중국인인가 싶어서 인사도 안 하고 지나쳤다. 나중에서야 그도 한국인인걸 알았다.


시간이 남아 주변을 검색해 보니 꼭 가야 한다는 빵집 후기가 눈에 띈다. 시에스타가 가까워져서 급하게 찾아가니 이미 영업이 끝났다고 했다. 하나만 살 수 없냐고 조르니 딱 하나만 고르란다. 후기에서 가장 맛있다고 했던 빵을 골랐다. 저녁은 주방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넷이서 마트에서 장을 봐서 만들어 먹기로 했다. 직접 요리를 해 먹는 건 처음이다. (라면도 요리라면 두 번째) 메뉴는 파스타와 스테이크. 이렇게 먹으니 돈이 얼마 들지 않았다. 매일 해 먹으면 좋겠지만 요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쉽지 않다. 잠자리를 가리지 않으니 숙소비는 아끼고 식대를 아끼지 않는 것이 내 방식이다. 이런 성향과 순례길은 궁합이 잘 맞는다. 게다가 좋은 숙소를 찾아 다닌것도 아닌데 오늘처럼 좋은 알베르게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덤으로 누릴 수가 있다.


18일째, 걷는 것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지만 발바닥과 뒤꿈치 통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신기하게 걸으면 통증이 사라져서 걷는 건 또 문제가 없다. 양쪽 엄지발가락은 감각이 없어진 지 한참 되었지만 겉으로는 멀쩡하다. 레온에 가면 한의사가 있다는데 거기를 가봐야 하나. 레온까지 3일이나 남았다. 레온에서 연박을 할지 말지도 고민. 앞으로 일정을 어떻게 할지도 고민. 생각과 계획이 매일 바뀐다. 이 정도면 계획이 아닌 걸까. 계획을 하기 싫어서 계획이 있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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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미스타 (Fromista)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Carrion de los Con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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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침대 <Albergue de Peregrinos del Espiritu Sa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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