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7 카스트로헤리츠 → 프로미스타
2025.7.17 (Thu) | 35° | 6:25~ 14:25 (8h 00m) | 24km
"으악" 이렇게 맛없는 커피는 처음이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주방에 기부로 먹을 수 있는 커피가 있기에 생각 없이 따라 마셨다가 맛이 너무 없어서 잠이 다 깼다. 그동안 스페인에서 먹은 모든 커피를 통틀어 가장 맛이 없었다. 스페인커피라면 다 맛있는 줄 알았지. 그렇다고 기부를 안 할 순 없고, 제 돈내기엔 화가 나는 맛이라서 20센트를 넣고 나왔다.
보통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과 같은 숙소를 쓰더라도 각자의 컨디션에 맞춰 따로 출발한다. 하지만 카스트로헤리츠 공립 알베르게는 준비하는 동안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조라 어제 같이 걸어온 넷이 자연스럽게 함께 떠나게 됐다. 레온(Leon)까지 이어지는 메세타 구간은 평평한 대평원 지대지만 오늘은 출발부터 낮은 산(언덕)을 하나 넘어야 했다. 산이 민둥민둥하고 낮아 보였는데(약 200m) 오르막은 오르막이다. 근력이 부족한 다리를 후달거리며 스틱의 도움으로 힘겹게 정상에 올랐다. 걸어온 방향을 돌아보니 빨간 해가 이제 막 떠오르고 있었다. 일몰에 반하고 일출로 헤어지는 잊지 못할 카스트로헤리츠다.
두 시간을 걸어 이테로 델 카스티요(Itero del Castillo)를 지날 때 갑 티슈처럼 작은 직사각형의 특색 있는 건물을 만났다. 성당인가 싶어서 호기심에 들어간 곳은 성당이면서 알베르게였다. 찾아보니 이름이 Ermita de San Nicolas인 침대가 8개뿐인 기부제 알베르게로, 봉사자들이 순례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저녁엔 촛불을 켜고 긴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한다고 한다. 마지막엔 한 명씩 포옹으로 환송해 준다는 너무 낭만적인 곳이었다. 어제의 산 안톤 수도원의 알베르게도 그렇고 이런 특색 있는 알베르게들만 찾아다녀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시쯤 중간지점인 이테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 마을에 도착했다. 아침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는데 문을 연 곳이 없다. 이다음 마을까지는 8km를 넘게 걸어야 해서 오픈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고 식당 앞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앉아 있는데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사람들이 자꾸만 사라졌다. 뭔가 이상해서 내려가보니 평범한 건물 입구라고 지나친 곳이 알베르게 겸 식당이었고 다들 그곳으로 들어갔던 것. 우리도 따라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기다려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아 쫓아가 물어보니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겠다고 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 주문을 받았다. 음식이 나오는데도 한참이다. 늦게 온 다른 사람들의 음식이 먼저 나오는 이유가 있겠지. 참을 인을 새기며 받은 음식은 그렇다 쳐도 콜라를 위스키 잔과 줘서 다른 테이블을 보니 큰 컵에 얼음까지 담겨있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음료잔과 얼음을 달라고 성을 냈지만 또 한참 후에 가져다준 컵. 주방에 하나, 서빙 하나 두 사람이 바쁜 건 알겠는데 왜 다른 테이블은 멀쩡하게 서빙하고 우리 테이블만 이렇게 주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동양인을 만만하게 본 인종차별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 버럭 했다고 계산할 때 웃으며 식사 괜찮았냐고 묻는다. 지금 식당에 있던 사람들 다 떠나고 우리만 남았는데 괜찮을 리가.
오늘 걷는 길은 대부분 주변이 광활한 밭이다. 농작물이 볕에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스프링쿨러로 밭에 쉴 새 없이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거대한 새의 날개처럼 생긴 스프링 쿨러가 앞 뒤로 움직이며 물을 뿜는다. 사람은 스스로 볕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 역시 숨을 곳 없는 망망대지다. 마실 물도 다 떨어져 갈 때쯤 정말 오아시스를 만났다. 어느 천사 같은 농장주가 스프링 쿨러를 사람들이 걷는 도로까지 물이 뿌려지게 세팅해 둔 것이다. 모두가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물을 맞는다. 이렇게 몸을 적셔도 수 분 내로 모두 말라 버리지만 그 잠깐의 시원함에 추진력이 상승한다.
메세타 구간에 들어선 이후 주변 순례자들이 바뀐 느낌이다. 보이던 사람들은 안 보이고 못 보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도 새로운 한국 청년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땐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쳤는데 몸이 다부지고 건장해서 모두 체대생일 것 같다고 예상했다. 보아디야 델 까미노 (Boadilla del Camino) 마을에서 다시 만나 그늘에 앉아 함께 쉬는데 또 다른 건장한 한국 청년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뉴 청년들끼리 말도 안 나눠서 관계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둘은 아주 쿨 한 친구사이였다. 출발 이후 일정도 다르게 걷다가 부르고스부터 다시 만나 같이 걷고 있다고 했다. 친구라고 해도 서로 걷는 속도나 하루의 목표가 다를 수 있으니 괜찮은 방법 같았다.
오늘의 순례길 후반부는 목적지인 프로미스타(Fromista)까지 운하(Canal de Castilla)를 따라 걷는 길이다. 이 운하에 프로미스타행 유람선이 다닌다기에 몇 시에 탈 수 있는지 아무리 검색해도 정보가 잘 나오지 않았다. 포기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우리가 딱 선착장을 지나는 타이밍에 배가 들어왔다. 직원에게 배를 탈 수 있는지 물으니 가능하지만 지금은 투어 중이기 때문에 순례자 할인은 안되고 일반 가격을 내야 한다고 했다. 배에서 우르르 내렸던 사람들이 잠시 후 다시 배에 올라타는 걸 보니 단체 유람 중인 배인데 그냥 태워준 듯하다. 이미 좌석은 거의 다 차서 한두 자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갑판에 서서 가도 괜찮다고 해서 밖으로 나와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감상했다. 운하 옆으로 순례길이 이어져 있어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나 좀 보라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배를 탄 것이 신났다.
잠시 후 중세시대 복장을 한 연기자가 앞으로 나와 인형극을 시작했다. 운하의 역사에 관한 극이란다.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에게 직원은 운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중세 시대에 왕의 주도로 건설이 시작된 운하는 완공이 늦어지고 교통이 발달되면서 결국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계속 자신은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본인만 모르는 본인의 능력. 운하의 끝이자 목적지인 프로미스타에 도착해 배에서 내릴 때도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해주었다. 식당에서 불쾌했던 경험이 이분의 친절로 싹 잊혔다. 그러고 보면 식당에서 늦게 출발 한 덕에 유람선을 타게 됐다. 인생사 새옹지마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오늘 숙소는 사설 알베르게이다. 이 마을의 공립 알베르게가 악명이 높아서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오늘 숙소에는 총 7명의 한국인이 머문다. 숙소에서 새로 만난 한분은 일정이 촉박해서 하루에 긴 거리를 걷고 있다고 하셨다. 들어보니 도착일이 나와 비슷해서 그 일정이면 그렇게 걷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지만 본인 마음이 굉장히 급하신 것 같았다. 길을 걷는 방식은 각자의 마음에 따라가는 것이니 정답은 없다. 긴 거리를 걷는 이유가 있으시겠지.
프로미스타에는 유명한 폭립 맛집이 있는데 순례자들이 많이 방문하고 특히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오늘 함께 걸은 일행과 길에서 만난 두 명까지 6명이 함께 이곳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숙소에서 전날 명상과 성터방문을 함께 한 스페인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우리가 이 식당을 간다고 하니 본인도 그곳에 갈 거라며 거기서 보자고 하셨다. 같이 밥을 먹자는 걸까. 거기서 마주치면 인사하자는 걸까. 할아버지는 뒤늦게 나타나 한국 사람 6명이 앉아 있는 식탁 중앙에 합석하셨다. 바르셀로나에서 오셨다는 할아버지는 여러 번 순례길을 걸으셨고 이번엔 사하군까지만 걷는다고 했다. 우리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덕에 알게 되었는데 오늘 만난 두 청년은 사제가 되려는 신학대학 동기생이었다. 당연히 체대생일줄 알았는데!
식사 후에 식당 사장님이 우리의 단체사진을 찍어주시고 본인이 함께 나온 사진도 한 장 남기시고는 나에게 인스타그램을 알려주시면서 디엠으로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식당 계정에 들어가 보니 이렇게 받은 사진을 그 사람을 태그 해서 올리고 계시길래 은둔형 인스타그래머인 나는 디엠을 보내지 않았다.
밤이 되었지만 숙소 안은 에어컨이 없어서 무척 더웠다. 바람이 부는 숙소 밖이 차라리 나았다. 모여있는 우리에게 작고 귀여운 옆집 할머니가 다가와 말을 거셨다. 본인은 원래 마드리드에 사는데 더운 여름에만 이곳에 와서 살고 있다고 정말 귀여운 말투로 말씀하셨다. 조곤조곤 말을 잇는 할머니의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모두가 반해버렸다. 아이가 아닌 할머니의 귀여움에 반할 수도 있다니. 보는 내내 나도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생각했다.
오늘은 유독 길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이 정도면 잘 걷고, 잘 먹고 있는 것 같다.
더위가 힘들게 하지만 추위보단 낫지.
내일도 오늘만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