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묘한 바람이 부는 곳, 카스트로헤리츠

Day16 요르니로스 델 까미노 → 카스트로헤리츠

by 게으른여름

2025.7.16 (Wed) | 35° | 6:30~12:30 (6h) | 21km



순례길에서 한국인들이 부지런하다고 하지만 우리 방에선 예외인 것 같다. 새벽부터 부산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일어났을 땐 이미 대부분이 떠난 후였다. 어제 늦게 출발해서 고생했으니 오늘은 나도 늦지 않게 출발해야지.


초반엔 아침에 출발하면서 먹으려고 전날 미리 사과나 바나나 같은 것을 사두었지만 점점 귀찮아서 그것조차 하지 않고 있다. 빈속으로 걸으면 살이 좀 빠질 것 같기도 하고.. 한 시간쯤 걸었을 때 준호와 마주쳤다. 준호는 사진을 찍으면서 걷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보다 천천히 걷는다. 그래서 이전에도 늦게 걷는 나와 계속 마주쳤고 오늘도 내가 더 늦게 출발했지만 다시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어서 부르고스에서 함께 한국 반찬을 나눠먹었던 태훈까지 만나 함께 걷는 사람이 셋이 되었다.


오늘은 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얼마나 뜨거워지려고 그러는지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더위에 갈증이 났다. 첫 마을인 온타나스(Hontanas)에 도착해 정해진 코스인듯 처음 마주친 바에 들렀다. 그곳에서 준호의 순례길 메이트인 지성을 만났다. 아침을 해결하고 자연스럽게 넷이 함께 길을 나선다. 보통 남들은 나보다 걸음이 빠르지만 사진을 찍는 준호와 천천히 걷는 태현, 다리를 다친 지성과 걷다 보니 흩어지지 않고 계속 함께 걷게 됐다.


나를 뺀 나머지 셋은 순례길 초반부터 알던 사이다. 나는 이들보다 출발이 이틀 빨랐지만 피레네에서 1박을 하며 하루 늦어지고, 로그로뇨에서 연박을 하며 하루가 또 늦어져서 보통의 일정 대로 걷는 사람들에겐 중간에 새로 나타난 사람이다. 같은 길을 겨우 하루 차이로 걸어도 영원히 모르는 사람이고, 같은 날 같은 길을 걸어도 계속 엇갈리다 끝내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걸 겪으면서 길 위에서 연결되는 인연들이 흥미로워졌다.


마을을 나가는 길에 들른 성당에서 포춘쿠키처럼 메시지가 담긴 종이가 있길래 뽑아보았다. 'When you realize nothing is lacking, the whole world belongs to you.' 나에겐 크게 와닿지 않는 말이다.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다는 생각뿐인데. 그래서 이 문구가 나온 것일까. 일단 간직해 본다. 언젠가 다시 꺼내보면 느낀 바가 다를지도 모르지.


날은 금세 뜨겁고 메말라 갔다. 태양을 피할 곳 없는 길에서 간혹 만나는 나무그늘이 너무 소중했다. 다시 또 콜라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쯤 산 안톤(San Anton) 수도원 유적지를 마주쳤다. 흔적만 남아 폐허 같은 모습이지만 남아 있는 건물의 잔해에서 오히려 아우라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곳 입구 자판기에 아이들이 음료를 채워 넣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 해본 듯 능숙했지만 속도가 느려 쳐다보고 있자니 목이 더 타들어 갔다. 누군가가 음료를 먹을 수 있는지 물으니 자판기에서 시원한 음료를 꺼내주고 돈을 받았다. 덕분에 나도 시원한 콜라를 건네받았다. 콜라를 마시며 둘러보는데 알베르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지금 기부제 알베르게로 운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전기도 핫샤워도 없는 그냥 몸을 누일 공간만 있는 곳이지만 밤에는 별을 보는 낭만적인 프로그램도 있는 듯했다. 한 번쯤 이런 곳에 머물러 보는 것도 좋겠다 싶지만 오늘 덜 걸으면 내일 더 걸어야 하니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의 목적지인 카스트로헤리츠(Castrojeriz)에는 한국사람들에게 유명한 알베르게가 있다. 한국 사장님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비빔밥과 된장국을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다. 와츠앱으로 문의를 해보니 하필 오늘은 휴무란다. 부르고스에 이어 두 번째 한식 실패. 오늘도 공립 알베르게로 간다. 카스트로헤리츠는 언덕 위의 마을이었고 공립 알베르게는 마을 깊숙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알베르게로 향하는 중에 다른 알베르게 유리창에 붙어있는 '순례자를 위한 명상 클래스 6시' 사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오.. 재밌겠다. 태훈도 관심 있어하는 눈치라 같이 가보자고 했다.


나름 일찍 도착했는데도 씻고 빨래하고 나니 또 시에스타다. 바, 슈퍼 모두 문을 닫았다. 할 수 없이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가는데 어딘가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연 바에 술잔을 든 사람들이 모여있다. 반색하며 들어갔더니 영업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노는 거라고. 노는 김에 우리도 좀 껴주지. 입구에 살짝 취한 아저씨 한분이 서 계시길래 기대도 없이 지금 문을 연 곳이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웬걸 어딘가를 알려주신다. '제발'과 '설마'가 섞인 마음으로 찾아간 곳엔 마당에 아무도 없이 빈 테이블만 놓여있었다. 실망하며 다가가보니 홀 안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무시무시한 더위로 다들 실내에 있는 듯했다. 역시 시에스타에 모두 쉬는 건 아니었어.


어찌나 뜨거운지 잠시 걷는 동안 더위에 진이 빠져서 다들 밥이 아닌 음료와 맥주만 마셨다. 한참을 바에서 시간을 보내다 나와 태훈,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 준호까지 세 명이 명상 클래스로 향했다. 가까운 곳이라고 착각해 예상보다 시간이 걸려 2분을 늦어버렸다. 반겨줄 거란 기대와 달리 닫힌 문에 '명상이 시작했으니 다음 시간에 만나요'가 붙어있었다. 이럴 수가.. 문 앞을 떠나지 않고 안을 쳐다보고 있으니 누군가가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주었다. 이미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앉아 있었고 우리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모두 9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음악을 틀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각자 알아서 명상을 하는 분위기다. 방석이 너무 딱딱해서 다리가 금세 저려왔다. 불편한 자세 때문에 집중을 못하고 다리를 이쪽저쪽 바꿔 앉다 보니 명상이 끝났다.


이제 한 명씩 참석 소감을 말해보라고 했다. 당황해서 이 길이 내게 특별하고 오늘은 더 특별하다고 대충 말하고 넘겼는데 몇 분은 소감을 말하며 눈물을 터트렸다. 이거 잠깐 한 거치고는 감정이 너무 충만한 거 아닌가요.. 마지막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 함께 손을 잡고 노래를 따라 부르다 하늘높이 손을 올려 왼쪽 오른쪽으로 흔들었다. 이 진지하고 엉뚱한 상황이 마치 서양 인디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꾹 참았다. 웃음을 참는 나를 본 준호도 웃음을 참는다. 고갤 들어 천장을 바라보고 손을 더 열심히 흔들었다.


기대만큼 깊은 명상에 빠져들진 못했지만 이곳의 분위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에스닉하고 독특한 인테리어와 뭔지 모를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었다. 주인인 미아는 작가이기도 해서 그녀의 작품이 곳곳에 진열되거나 걸려있었고 굿즈도 만들어 팔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우리에게 아래층도 구경해 보라고 권했다. 내려가보니 한쪽은 정원이 보이는 통창, 한쪽은 넓은 주방이었다. 비탈에 있는 집이라 아래위 모두 해가 잘 들었다. 이런 멋진 알베르게는 다들 어떻게 알고 온 걸까.


명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던 지성을 만나 넷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낮엔 사람 하나 없는 유령마을 같더니 저녁이 되니 마을에 활기가 돈다. 점심을 제대로 안 먹어서 그런지 배가 너무 고파서 메뉴를 다섯 개나 시켰지만 결국엔 다 먹지도 못하고 왕창 남겼다. 지성은 순례길 릴스를 올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명상 모임이 얼마나 유니크했는지 얘기하며 그걸 찍었어야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명상을 했던 곳의 쎄요를 받고 싶어서 식사 후에 명상 멤버만 그곳에 다시 들렀다. 숙소에 머무는 사람들이 막 길을 나서며 언덕 위의 옛 성터에 올라갈 거라고 우리 보고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원피스와 쪼리 차림이라 아무리 낮다 해도 저 정도 언덕을 오르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장을 받고 나가려는데 함께 명상을 했던 다른 분이 또 옛 성터를 가자고 한다. 잠깐 고민하다가 이렇게 여러 번 기회가 오는 거라면 해보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좋다고 대답했다. 알베르게 강아지 까밀라까지 다 함께 언덕을 향해 출발한다.


언덕은 가파르진 않았지만 가시 덩굴이 많아 지나기가 쉽지 않았다. 십여분 오르니 정상이다. 언덕 위의 동네에서 또 언덕을 올라오니 생각보다 꽤 높은 지점이었다. 거기서 또 삼층짜리 탑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 마을은 물론 오늘 지나온 길까지 한눈에 다 보였다. 시간은 9시가 넘어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사방이 주황빛으로 물들어간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시원하고 센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쓸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칠 때마다 이 몽환적인 풍경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어쩌다 오묘한 분위기의 그 알베르게에 홀려서 이런 멋진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 걸까. 카스트로헤리츠가 조금은 신비하게 느껴진다.


시간도 잊고 경치를 구경하다 보니 10시가 가까워졌다. 통금시간이 넘으면 문을 잠가 버리는 알베르게도 있어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가자. 다들 여운이 남아서 조금은 들뜬 표정이었다. 올라가길 잘했다고 이야기를 나누다 지성은 이걸 또 놓쳤네 하며 웃었다. 앞으로 다른 멋진 순간들을 마주하겠지만 분명 오늘이 최고의 순간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이 기분까지 그대로 기억에 담아버릴 수 있다면.

언젠가 꿈에서 이 순간을 다시 마주하기를.



요르니로스 델 까미노 (Hornillos del Camino) → 카스트로헤리츠 (Castrojeriz)


오늘의 침대 <Albergue de Peregrinos municipal San Este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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