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세타는 초면이라..

Day15 부르고스 →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by 게으른여름

2025.7.15 (Tue) | 28° | 8:45~ 15:05 (6h 20m) | 21.5km


또 밤새 추워서 잠을 설쳤다. 하필 내 자리가 창문 바로 앞이자 외부 출입구와도 가까웠다. 경량 패딩을 꺼내 입고, 창문을 닫고, 돌로 고정된 출입문까지 닫았지만 여전히 너무 추웠다. 그런데 나만 춥나? 그 많은 사람들 중 아무도 열린 문을 닫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침낭을 가져오지 않은 내 탓이오.


오늘부터 메세타 길이 시작된다. 다들 메세타 메세타 하는데 도대체 메세타가 뭔데? 사전적으로는 스페인 북부에 펼쳐진 광활한 고원지대란다. 지루해서 스킵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이 길 때문에 프랑스길을 온다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막연하게 머릿속에 그려 본 메세타는 뭔가 광활하고 도시와 단절된 전원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갑자기 마법의 날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메세타에 들어가기 전 관련 용품을 사야 한다는 압박이 생겼다. 메세타라고 슈퍼가 없진 않겠지만 내가 원하는 종류가 없을 듯해서 대도시인 부르고스에서 해결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잠을 설치기도 했고 마트가 문을 여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기에 늦게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체크아웃을 독촉하러 들른 봉사자분이 내 침대에 걸려있는 가느다란 옷걸이를 보고는 기다리라고 하더니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여행용 옷걸이를 가져다주셨다. 사실 내 옷걸이는 집에 있던 세탁소 옷걸이 중에서도 가장 가벼운 것이다. 요리용 저울에 무게를 재서 가장 가벼운 것으로 골라 온 건데 그분의 눈엔 그게 부실해 보였나 보다. 짐이 늘었지만 나름 선물이니 잘 챙겨 가야지. 뉴질랜드 제임스 커플도 아직 체크아웃 전이라 인사를 나눴다. 부르고스에 더 머물지 그냥 떠날지 고민 중이라고 한다. 다들 비슷하구나. 감기로 부르고스에 하루 더 머문다는 한국 분과 근처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오픈 시간을 맞춰 마트에 들렀지만 내가 원하는 상품이 없었다. 대형 마트라 수십 개짜리 대용량만 팔아서 난감했지만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뭐라도 구매했다. 무게를 줄인다고 많이 챙기지 않은 건데 동키를 쓸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잔뜩 가지고 올 걸..


부르고스를 빠져나오는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외곽에는 부르고스 대학의 단과대 별 건물이 큰길 양옆으로 늘어져 있었다. 방학이라 그런 건지 원래 날이 더워 건물 밖에 사람이 없는 건지 대학가 느낌보다 한낮의 베드타운 마냥 한적했다. 출발이 늦어서 길에 순례자가 보이지 않는다. 혼자 걷다 보니 중간에 길을 잘못 들기도 했는데 마주친 동네 분이 친절하게 이 길이 아니라고 알려주셨다.


정오가 다 되어 타르다호스(Tardajos) 마을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쭉 이어서 걷기로 했다. 다음 마을인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Rabe de Las Calzadas)의 끝에는 아주 작은 성당(수녀원)이 있다. 특색이 없어서 자칫하면 지날 칠 수도 있지만 순례자라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다. 쎄요도 찍을 수 있고 축원과 함께 성모 마리아 목걸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시가 다 되어 도착하니 할머니 자매님께서 내 이름을 묻고 이마에 대고 축원을 해주신 후에 작은 마리아 펜던트가 달린 하늘색 실 목걸이를 걸어주셨다. 일찍 도착한 순례자는 수녀님께 축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게 부러웠다기보다 늦은 시간까지도 순례자를 위해 그곳을 비워두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했다. 너무 받고 싶은 목걸이었다.


마지막 마을을 떠나 두 시간을 그늘 없는 흙길을 걸었다. 바짝 마른땅을 걷다 보니 그 위에 붙은 수분이 빠진 지렁이가 된 기분이다. 이전 마을에 들러서 시원한 음료를 마셨어야 했는데. 태양에 영혼을 뺏겨 흐느적 걷는 내 옆으로 웬 순례자가 가방에 우산을 매달고 두 손으로 스틱을 짚으며 지나간다. 순례길도 템빨이구나.


며칠 전 겪은 일도 있고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혹시 몰라서 가는 길에 숙소를 예약해 두었다. 3시가 다 되어서 목적지인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Hornillos del Camino)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의 리셉션 테이블 옆에 음료 냉장고가 있어 콜라부터 구입해 허겁지겁 마셨다. 오피스의 팸을 닮은 알베르게 주인은 친절하고 러블리했다. 디너를 예약할 수 있다고 하길래 저녁 고민을 하기 싫어서 먹겠다고 했다. 씻고 빨래하고 빨래를 널고 저녁을 기다렸다. 날씨가 얼마나 뜨겁고 건조하면 빨래가 널자마자 바로 마른다.


저녁은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앞에 놓인 샐러드와 와인, 빠에야를 원하는 만큼 가져다 먹었다. 러블리한 사장님이 직접 만들어주었고 맛도 꽤 괜찮았다. 커뮤니티 디너나 다름없는 자리였는데 서양 남자 한 명이 배려 없이 자기들끼리 큰소리로 대화하는 바람에 나머지 사람들은 뻘쭘하고 어색한 식사 자리가 되어버렸다. 후식으로 나온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이름을 물어보니 '나티야스'라고 했다. 디저트를 즐기지 않아서 이 맛있는 걸 이제야 알았네. 식사 전에도 후에도 주변을 구경할 기운이 없어 숙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이 동네에 대한 기억은 이 숙소가 전부다.


메세타 첫날.

한여름의 까미노는 늦게 출발하면 개고생이다.

하루 걸어봤지만 여전히 메세타가 무슨 느낌인지 잘 모르겠는데..



부르고스 (Burgos) →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Hornillos del Camino)
오늘의 신발장 <Hornillos Meeting Point>


*더위에 정신이 없어 침대 사진 찍는 걸 까먹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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