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 전망대에서 익스큐즈 미를 외치다

Day14 까르데뉴엘라 리오 피코 → 부르고스

by 게으른여름

2025.7.14 (Mon) | 28° | 7:45~ 11:45 (4h) | 13km



순례길은 대부분 작은 마을을 지나가지만 간간이 대도시를 만나게 된다. 오늘은 세 번째 대도시인 부르고스(Burgos)로 가는 날이다. 순례자들 각자의 코스가 모두 다르지만 대부분 이런 큰 도시는 지나치지 않고 꼭 들르는 편이다. 어제 계획보다 6km를 더 걸어온 덕에 오늘은 14km만 걸으면 된다, 5km를 한 시간 반 정도 잡으니 여유 있게 걸어도 충분히 오전에 도착할 수 있어서 7시 넘어까지 마음 놓고 늦잠을 잤다. 숙소의 모두가 같은 마음인지 다들 비슷하게 일어나 느릿느릿 준비를 한다.


로그료뇨 이후 5일 만에 새로운 도시를 만날 생각에 들뜬 기분이 들었다. 부르고스까지 동키를 이용하고 이후에 가방을 메려고 했지만 어제 얼떨결에 배낭을 메고 온 덕에 오늘은 온전히 배낭을 메고 걷는 순례자로 한 단계 진화했다. 자그만 백팩을 멘 것보다 확실히 커다란 배낭을 멘 모습이 더 폼이 난다. 오늘 누군가를 만나면 꼭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야지.


오늘은 출발부터 아스팔트 길이다. 한 시간 정도 걸어오니 부르고스 공항 활주로가 나타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작은 비행기들이 연달아 날아올랐다. 부르고스에 들어선 것은 지도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4차선 도로 양 옆으로 죽 늘어선 크고 작은 공장들과 갓길에 주차된 대형 트럭들 사이를 한동안 지루하게 걸었다. 공장지대가 끝나니 높고 빽빽한 아파트 거리가 이어졌다. 시골의 모든 집들은 테라스와 창가에 예쁜 꽃이 담긴 화분을 놓아 자신의 취향과 센스를 드러내며 경쟁하듯 외관을 꾸몄다. 도시의 아파트의 창가는 메마른 시멘트뿐이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과 나누던 인사도 사라졌다. 하긴 도시에서 마주치는 그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긴 하지.


어제 잠시 마주쳤던 대만 친구를 부르고스 들어오는 길에 또 만났다. 아타푸에르카에서 잘 곳이 없어 난감해할 때 근처 슈퍼 앞에 앉아 여유 있게 빵을 먹고 있길래 여기 남는 침대가 없다는데 넌 어떻게 할 거냐 물어보니 본인은 캠핑을 해서 괜찮다고 했다. 순례길에서 마주친 첫 캠퍼라 신기했다. 다시 만난 김에 매일 캠핑을 하는지, 이런 도시에서도 캠핑을 하는지, 원래 대만에서도 캠핑을 했었는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모두 예스. 갓 대학을 졸업했고 전공이 스포츠 마사지라고 하기에 돈을 주고 마사지를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화가 원활히 통했다면 발의 통증을 없애는 스트레칭을 알려달라고 했을 텐데. 사진을 같이 찍자길래 서로의 폰에 셀카를 남기고 나에게 오늘은 잠자리를 잘 찾길 바란다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다행히 오늘은 확실한 잘 곳이 있다. 이동 거리가 짧아 공립 알베르게의 체크인 시작 시간인 12시가 되기도 전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이렇게 빨리 도착한 건 처음이다.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는 듣던 데로 시설이 좋았다. 최근에 리뉴얼된 듯 모든 게 새것이었고 침대마다 칸막이로 막혀있어 마치 큰 독서실 같았다. 한쪽 벽은 칸칸이 나눠진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었고 손빨래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층마다 갖춰져 있었다. 이런 여러 디테일을 보니 분명 알베르게의 쓰임을 잘 아는 사람이 설계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지금까지 중 최고의 알베르게다.


부르고스에는 유명한 한식집이 있다. 십여 일 하몽 끼워진 바게트를 씹다 보면 지금이 딱 한식 먹기 좋을 시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쉬는 날이라 차선으로 한국 도시락(반찬) 가게를 가보기로 했다. 준호와 그가 소개해준 태훈까지 셋이 오늘 점심 메이트가 됐다. 한식집 휴무 영향인지 몇 가지 반찬은 이미 솔드아웃이다. 남은 반찬 여러 종류를 포장해 와 숙소 주방에서 나눠 먹었다. 김치찌개의 감동까지는 아니지만 한식의 아쉬움을 달랠 정도의 식사였다. 앞으로 한식집이 또 있겠지.


식사를 마칠 때쯤 다른 한국 분을 만나 넷이 함께 부르고스 구경을 나가게 됐다. 성당 앞 광장을 지나는데 신문 이미지에 사진을 합성해 주는 사진사가 서비스라며 우리 사진을 찍어 건네준다. 그냥 받기 미안해서 돈을 내고 한 장을 더 찍었다. 서로 만난 지 한 시간 남짓인데 건네받은 사진 속에 넷이 가족처럼 다정하게 웃고 있다. 근처 츄러스 맛집을 들러 테라스에 앉아 먹고 있는데 시티투어버스가 바로 앞에 정차했다. 이곳이 출발지인듯했다. 다가가서 운행 시간을 물어보니 곧 출발이었다. 함께 있던 분들에게 권해보았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혼자 다녀 오기로 했다.


부르고스 시티투어버스는 열차처럼 생긴 승객칸 두 대가 이어진 버스였다. 30여분간 도심 위주로 운행했다. 반나절 정도면 걸어서 다 둘러볼 루트였지만 나처럼 더 걷기 싫은 게으른 관광객에게는 좋은 대안이었다.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부르고스 전망대이다. 이곳에 잠시 멈춰 경치를 감상할 시간을 주었다. 나만 혼자 연결된 뒷 칸에 타고 있었는데 앞 칸 사람들이 다 내리고 기사까지 내릴 동안 뒷 칸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익스큐즈 미!! 익스큐즈 미!!" 아무리 불러도 기사님은 듣지 못했다. 그냥 앉아 있을까. 아니지 전망대는 일부러 올라와서도 보는곳인데. "익스큐즈 미!!!! 익스큐즈 미!!!!" 큰일난듯 호들갑을 떠니 밖에서 지켜보던 스페인 아주머니가 기사님을 데려 온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손짓을 하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문을 열어주셨다. 수동으로. 그냥 스스로 열고 나오는 구조였다. 분명 내가 열었을 땐 안 열렸는데.. 기사님은 황당해하고 스페인 아주머니는 빵 터져서 웃고 나는 쪽팔리지만 의연한 척했다. 안 볼 사람인데 뭐. 우여곡절 끝에 보게 된 부르고스의 풍경. 빽빽한 건물들 사이로 뾰족이 솟은 고딕풍의 부르고스 대성당이 포인트 였다. 도시 넘어 멀리 넓게 펼쳐진 밀밭이 보였다. 어디든 멀리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근사해 보이는 것 같다. 내 인생도 멀리서 보면 멋있게 보이려나. 전망대에서 내려올 땐 뒷 칸에 혼자 앉지 않고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았다. 문을 또 열지 못하면 진짜 욕먹을 것 같아서.


부르고스 성당은 스페인 3대 성당 중 하나로 순례길에서 꼭 들려야 하는 장소로 꼽히지만 내부를 구경하지 않고 저녁 미사에만 참석했다. 미사는 성당 옆 예배당에서 진행됐다. 포르투갈 순례길에서는 잘 몰라서 영성체 나눠주는 시간만 되면 쪼르르 앞에 나가서 넙죽 받아먹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야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번에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려는데 외국 순례자분이 가슴에 손을 얹고 나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나온 사람들에게는 신부님께서 이마에 십자가를 긋고 '갓 블레스 유'라고 해주셨다.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누군가가 나에게 축원을 해준다는 사실에 마음이 충만해진다. 미사가 끝날 때쯤 순례자들을 불러 앞에 세워 한 사람씩 성수를 뿌려 축원을 해주셨다. 미사에 오길 잘했어. 정말 할렐루야다.


미사 후엔 낮에 처음 만난 한국분들과 타파스 거리로 나갔다. 결정장애가 있는 내게 타파스바는 난감한 장소다. 알 수 없는 수많은 메뉴들은 선택을 더 어렵게 했다.. 한참을 주변 사람들은 무엇을 먹는지 두리번 거리다 부르고스가 순대처럼 생긴 모르씨야(Morcilla)가 유명한 곳이라고 하기에 그것을 주문해 보았다. 고심끝에 선택했는데 음 그냥 순대를 기름에 지진 맛이다. 아무래도 나는 미식가는 아닌 것 같다.


부르고스에서 연박을 할까 했는데 앞으로 일주일 정도의 (그렇게 지루하다는) 메세타 길을 새로운 사람들 틈에서 홀로 외롭게 걷기가 싫고, 이제 가방도 메야하니 무게를 줄여야 해서 부르고스에서 쇼핑할 명분도 사라졌다. 해서 다음날 바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반나절 만에 한식, 츄러스맛집, 투어버스, 미사, 타파스 거리 다 뿌시고 내일부터 시작된다는 메세타는 어떤 곳일까 모험을 떠나는 심정으로 잠자리에 든다.


산티아고 가는 길 제2장 끝.



까르데뉴엘라 리오 피코 (Cardenuela Rio Pico) → 부르고스 (Burgos)
오늘의 침대 <Albergue Municipal de Bur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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