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3 비얌비스티아 → 카르데뉴엘라 리오 피코
2025.7.13 (Sun) | 27° | 6:30~17:00 (10h 30m) | 30.1km
눈을 떴을 때 부지런한 유럽인 두 분은 벌써 떠난 뒤였다. 서둘러 짐을 꾸려 나오니 신발장 옆 선반에 커피머신 속 따뜻한 커피와 사람 수에 맞춘 커피잔 3개, 빵과 잼, 버터가 놓여 있었다. 조식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마무리까지 세심한 사장님의 정성이 느껴져서 남겨진 내 몫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다. 이건 아침이 아니고 감동이야..
오늘의 목표는 24km이다. 그럼 내일은 부르고스까지 20km만 가면 된다. 구름이 적당히 끼어 오늘도 선선한 날씨일 것 같다. 아주 좋아. 오늘의 목적지는 아타푸에르카(Atapuerca). 선사시대 유적지라고 한다. 유럽인의 최초 조상이 발견된 곳이라나. 뭔가 재미난 게 있겠지 기대하며 출발.
그라뇽 이후로 광역자치주가 또 바뀌었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 표식을 론세스바예스 이후 처음 만났다. 오늘도 정보를 찾아보지 못하고 출발했는데 중간에 무려 12km 정도의 길고 긴 숲길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너무 늦었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 많이 걷겠다고 출발 이후 쉬지 않고 계속 걸어왔다.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 호객하던 푸드트럭도 이미 지나친 지 오래다. 아침에 요기를 하지 않고 나왔다면 기력도 없이 울면서 남은 길을 걸어갔겠지. 이렇게 긴 숲 길이 있다는 것도 놀랍고 내가 그곳을 쉬지 않고 걷고 있다는 것은 더 놀랄 일이다. 쉴 곳은커녕 기댈 곳도 보이지 않았다. 거의 끝에 다다라서야 앉을 만한 돌덩이를 발견했다. 4시간 20분 만에 처음 쉬어본다. 내 발...
다음 마을인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준호를 또 만났다. 그도 나처럼 쉬지 못하고 계속 걸어온 상태였다. 처음 보이는 바를 들어갔는데 이곳이 피자 맛집이라는 후기를 본 것 같다. 필요한 정보는 보지 못하고 맛집 정보만 기억하다니. 각자 피자를 한 판씩 주문하고, 카운터 옆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큰 유리병에 담긴 샹그리아가 시원해 보여 콜라 대신 샹그리아를 시켜보았다.
길에선 사람들이 보이지 않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마틴과 제임스, 앰버 커플을 만나 오늘 목적지를 물어보니 다들 나와 같은 마을이라 했다. 이것이 마냥 반가워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때는 몰랐지.. 야외 테이블에서 피자를 먹는데 동키 회사 밴이 앞에 선다. "거기에 내 가방 있어!!" 반가워서 기사에게 소리치니 내 이름을 물어 체크하고는 잘 가져다주겠다며 눈을 찡긋한다. 이따 보자 내 배낭.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목적지로 향하던 아타푸에르카. 그전 마을인 아헤스(Ages)에 머무려고 했던 준호까지 다들 여기로 간다는데 함께 가자며 데리고 왔다. 도착한 공립 알베르게는 이상하게 고요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마당의 빨랫줄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굳게 닫힌 리셉션 창문에 붙어있는 'DAY OFF'. 왜????? 까미노 어플이 여러 개 있는데 최신 소식이 잘 업데이트되는 편이다. 아타푸에르카의 몇 개의 알베르게는 일시적으로 문을 닫은 상태로 표시되어 있었고 내가 가방을 보낸 공립은 아무 안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가방은 어떻게 되는 거지. 불안이 올라오다 배달 기사님의 눈짓이 생각나서 어딘가 잘 두었겠지 이내 가라앉았다. 이곳저곳을 뒤져 창고로 추정되는 곳에서 가방을 찾았다. 이제 숙소를 찾아야지.
이 마을에서 운영되는 알베르게는 6곳이지만 모두 문을 닫아 결국 단 하나의 알베르게만 운영 중인 상태였다. 조금 더 서둘렀으면 좋았으련만 간발의 차이로 한분이 먼저 들어가 체크인을 했고 사장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베드만 남았다고 알려주셨다. 당황한 내게 기다려 보라며 어디론가 연락을 하시더니 예약자가 연락을 안 받으니 조금 기다려 보고 너에게 침대를 주겠단다. 혹시 몰라 예약자 이름을 물어보니 제임스 커플의 예약이다. "그들은 여기로 오고 있어요.."
내가 이 마을로 가자고 추천하기도 했고 나보다 더 긴 거리를 걸어온 준호가 여기에 머무는 게 맞는 것 같아 체크인을 양보했다. 이제 6km를 더 걸어 다음 마을인 카르데뉴엘라 리오 피코(Cardenuela Rio Pico)로 갈지, 3km를 뒤로 돌아가 이전 마을인 아헤스로 갈지 결정해야 한다. 그래, 어차피 고생할 거면 못 먹어도 고 지! 이다음 길이 돌산이라고 들어서 내일 역시 동키를 쓸 생각이었다. 그 이후에 배낭을 멜지 고민해 보려고 했는데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렇게 13일 만에 처음으로 배낭을 메고 순례길을 걷는다.
배낭을 메고 걷는 것은 걱정보다 할 만 했다. 십 여일 걸으며 체력이 확실히 좋아진 것 같다. 낮은 돌산에 오르니 저 멀리 내일의 목적지인 부르고스가 보였다. 아침 일찍 이곳에 올라왔으면 이런 풍경을 보지 못했을 테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두 번 쫓겨날 순 없어서 다음 마을의 숙소를 찾아 문자를 보냈다. 오늘 한 사람 숙박이 가능한지 가격은 얼마인지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si' 뿐이다. 바쁘신가 어쨌든 가능하다니 됐다. 시간이 늦긴 했지만 어쩜 이렇게 길에 사람 하나 없는지. 혼자 남아 나머지 공부를 하는 기분으로 한시간 반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숙소와 함께 운영하는 식당 구석에 온 가족이 모여 티비를 보다 내가 들어가니 젊은 여사장이 여유롭게 일어나 다가왔다. 뭐라고 하는 말이 들리진 않아도 여기 묵으려고 하냐고 묻는듯했다. "씨씨", "숙박은 8유로고 저녁은 12유로야." 점심에 피자 한 판을 다 먹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저녁 메뉴를 고를 기운도 없어서 좋다고 했다. 저녁을 먹는다고 하니 살짝 웃는다. 사장님이 뭐라고 하자 중딩쯤 되는 아들이 느그적 거리며 일어나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 숙소 설명을 해주려나 싶었는데 방 입구에서 "침대 고르면 돼." 하고 돌아선다. 이후에 빨래를 맡기고 찾고, 저녁을 먹으면서 지켜보니 이 가족이 엄청 심드렁한데 할 건 다 해줬다. 불친절한 것 같지만 친절해. 매너리즘에 빠진 프로의 모습이랄까. 지금까지 관광객을 상대하는 친절 옵션을 장착한 스페인 사람들을 만났다면 이들은 날것의 스페인 가족을 보는 느낌이라 신선했다. 마치 스페인 영화를 보는 기분.
오늘 어쩌다 보니 30km를 걸어버렸다. 오늘 더 걸어온 덕에 내일은 14km만 걸으면 된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는 건 많이 해봤어도 내일의 일을 오늘로 끌어다 하는 건 드문 일인데. 나쁘지 않네.
모로 가도 산티아고만 가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