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향인을 위한 알베르게가 있다?!

Day11 나헤라 → 그라뇽

by 게으른여름
2025.7.11 (Fri) | 31° | 5:10 ~ 12:30 | 7h 20m| 21.9km


어제 실컷 마신 와인의 영향인지 모처럼 깊은 잠에 들었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잠든 시간 조용히 거실에 나와 배낭을 꾸려 출발하는 부지런한 순례자가 될 수 있었다. 가로등이 있는 마을을 걸어 나갈 때만 해도 당당한 기세였다. 15분 정도 걸었을까. 마을의 끝과 맞닿은 암흑의 길을 마주했다.


한 여름의 스페인은 보통 6시쯤 되어야 여명이 밝아온다. 저 시커먼 길은 몇십 분간 계속될 것이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아 고민하다가 다른 순례자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가방에서 사과를 꺼내 씹어 먹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데 멀리 일행이 아닌 두 명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급하게 남은 사과를 마저 먹고 다른 말도 없이 그 둘의 중간에 서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셋이 말없이 한참을 어둠 속을 걸었다.


한 시간쯤 걷다보니 날도 밝고 걸음도 느려지고 졸음이 또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찍 나왔으니 오전에 많이 걸으려고 했는데! 걷는 중에 잠이 오면 몸도 쏟아질 듯 꾸벅거리게 된다. 여기가 밖이고 뭐고 그냥 누워버리고 싶다. 지도를 보니 다음 마을인 아소프라(Azofra)가 멀지 않아 일단 그곳까지 가보기로 하고 잠을 이겨가며 간신히 걸어갔다. 6Km도 안 되는 거리를 두 시간 만에 도착했다.


문이 열린 바에 들어가 아메리카노와 또르띠아를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먹어도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아서 멍하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8시가 다가오니 텔레비전에서 산페르민 소몰이를 생방으로 중계해 주길래 잘됐다 저거나 구경하자 싶었다. 현장에선 흰옷을 입은 건장한 스페인 남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요란스럽게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8시가 되자 소들이 뛰쳐나왔고 난리를 치며 십여 분간 몸을 풀던 사람들을 몇 초 컷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소몰이가 끝나니 한 시간도 넘게 바에 앉아 있는 게 눈치가 보여 밖으로 나왔다.


근처 버스 정류장에 앉아 오늘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를 찾아보니 한 시간 오십 분쯤 후에 도착이다. 이렇게 계속 앉아서 기다리기엔 무리인 것 같고, 잠이 어느정도 깨기도 해서 되는 데로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이럴 거면 그냥 더 자고 나올걸. 난데없는 기면증이 당황스럽고 모처럼 일찍 나왔는데 소중한 아침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 속상하다.


어제 오늘 길이 내가 상상하던 프랑스길의 모습과 비슷했다. 끝없는 대평원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 역시 오늘도 불가마 길이다. 어제를 교훈 삼아 물을 얼려 나왔는데 4시간 만에 미지근해져 버렸다. 혹시 잘 안 녹을 까봐 물통의 반만 얼려서 물을 채워왔기 때문이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한 줌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아시아 남자가 옆에 와서 앉길래 한국인이냐고 물어봤다. 순례길에 대만과 홍콩 사람이 너무 많고 요즘은 스타일도 비슷해서 한눈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한국인이냐고 물어볼 거면 한국말로 물어보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볼 거면 영어로 물어볼 것을 더위에 정신이 없어서 아유 코리안이냐고 해버렸다. 근데 또 맞대. 나보다 이틀 늦게 생장에서 출발했다는 한국 청년과는 조금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자연스레 헤어졌다. 속도가 느린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잡힐 듯 하다가 점이 되어 멀리 사라져 간다.


나헤라 다음 일정으로 22km 정도에 있는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여기서 7km 정도 더 가서 그라뇽(Granon)이라는 마을로 가려고 한다. 프랑스길에서 그라뇽 기부제 알베르게를 꼭 들려야 한다는 글을 보아서 찾아보니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순례길 최고의 마을이라는 후기가 대부분이지만 기가 빨려서 별로라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경험을 했길래 이렇게 평이 나뉘는지 호기심에 가보고 싶어졌다. 숙소에 도착하면 빨래하고, 씻고, 밥 먹고, 자고 다 똑같은데 뭐라도 이벤트가 있으면 좋지.


오전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고 컨디션이 좋지도 않아서 산토 도밍고까지 걸어가서 마을을 구경하고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그라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12시가 한참 넘어 이 더위에 걷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을 때쯤 산토 도밍고 마을에 도착했다. 얼음을 너무 먹고 싶어서 바에서 폴라포 비슷한 아이스크림을 사서 꽝꽝 언 아이스크림을 억지로 씹어 먹었다. 차가운 단맛에 멍했던 정신이 또렸해졌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데에서 구워진 암탉이 노래했다'는 종교적 일화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의 성당에는 진짜 닭장이 있다. 순례자 할인으로 5유로를 주고 관람한 성당은 꽤 규모 있고 화려한 공간이었다. 성당 벽 높은 곳에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닭장 안의 닭들은 관리가 잘 되어 풍성하고 새하얀 털에 윤기가 흘렀다. 닭 팔자가 좋아 보이는 건 처음이다.


버스를 타기위해 찾아간 버스터미널은 터미널이라고 하기 애매한 보통 보다 좀 더 큰 정류장이었다. 그라뇽까지 구글맵으로 자동차 이동시간은 2분이란다. 걸으면 두 시간인데.. 자리에 앉으니 피곤이 몰려와 그 짧은 순간에도 깜박 잠이 들었다 깼다. 2분은 아니고 5분 정도 지나 다음 정거장인 그라뇽에 도착했다. 걸어서 도착할 때는 마을이 서서히 다가오는데 버스에서 내리니 갑자기 낯선 마을에 덩그라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라뇽은 작은 마을이다. 바게트처럼 긴 모양의 마을의 중심에 성당이 있고 성당 건물의 뒤편은 순례자들의 공간이다. 아마 그 옛날에도 이렇게 순례자들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싶은 특별한 정서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정원도 없이 오는 사람은 모두 받아준다고 한다.


이곳은 단지 쉬어가거나 잠을 자기 위해 머무는 알베르게와는 달랐다. 체크인 때 자원봉사자가 각국 안내문을 보여주면서 진행되는 프로그램들을 친절히 설명해 준다.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 참석하고, 저녁식사와 뒷정리를 마친 후 캔들 라이트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모두 강제성은 없으니 네가 원한다면 참석하라고 했지만, 참석하지 않는다면 여기 올 필요가 없었겠지.


오늘의 침대는 충격적 이게도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 나는 후기를 보고 미리 전날 사용했던 일회용 매트리스 커버를 챙겨 왔다. 이런 유난을 떠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편하게 잘 수 없을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 중 낯익은 얼굴이 많았다. 나헤라에서 나보다 더 이른 시간에 출발했던 미현은 물론 생장에서부터 만난 뉴질랜드 커플 제임스와 앰버, 프랑스에서 온 가브리엘과 어제 처음 만난 프랑스인 마틴과 홍콩에서 온 이안도 있었다. 뉴질랜드 커플과 가브리엘은 한동안 못 봐서 이제 일정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저녁 준비 전 잠깐 뒷마당 벤치에 앉아 서로의 나이와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 나이를 듣고 놀라는 건 동양인의 이점 덕이겠지만 항상 기분이 좋다.


저녁 준비는 음식 재료별로 여러 팀으로 나눠 진행됐다. 한쪽에서는 몇 명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일을 하지 않는다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분위기를 띄우는 것도 이곳에서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한 시간 남짓 저녁을 준비 한 뒤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미사가 진행됐다. 순례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찬송가를 한 소절씩 알려주었다. 중견 가수처럼 노래를 잘하길래 스페인 노래 교실에 온듯한 기분으로 열심히 따라 불렀다.(후에 알고 보니 순례자의 노래였다.) 영성체를 받는 시간에 미현과 나는 성당에서 살짝 빠져나와 이 동네 맛집이라는 제과점으로 갔다. 제과점 사장님은 우리가 머무는 알베르게에서 여기로 올 거라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셨다. 성당 앞 벤치에 앉아서 '초코가 많이 달지 않아.' '맛집이 맞네' 하며 빵을 나눠 먹는데 미사를 마친 사람들이 방금 우리가 다녀온 제과점으로 우르르 몰려 갔다. 그들이 가게 앞에서 둥글게 원을 만들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남일처럼 구경하면서 먼저 나오길 잘했다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와 거실의 긴 테이블 두 개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기 전 단체 사진을 찍었다. 단체 사진 하나는 내가 찍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사진과 내가 없는 사진 두 가지 버전이 생겼다. (왜 저를.. 제가 사진을 잘 찍게 생겼나요?) 식사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옆으로 전달하면서 각자 먹을 만큼 담아 먹었는데 우연히도 나와 미현의 닭이 마지막 남은 닭이라 유난히 작았다. 하지만 이 닭이 아까 그 제과점의 오븐에서 구워졌고 요리를 찾기 위해선 사장님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야 했다는 사실을 안 뒤로 작은 닭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끝이 아니었다. 다 먹은 그릇을 테이블 끝에 모아두더니 테이블 위로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 서너 개가 올라왔다. 초벌로 그릇을 닦아서 옆으로 보내면 다시 한번 헹궈서 옆으로 옆으로 보내는 시스템이었다. 당황할 틈도 없이 설거지가 시작되었다. 나는 또 이런 걸 잘하니까 맨 앞에서 그릇의 구석까지 찌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닦아 옆으로 건네주었다. 게다가 빠르게.


주어진 상황에 열심히 임하긴 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마지막 촛불의 시간은 처음부터 참석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침대로 돌아갔다. 이곳에 대한 후기가 모두 이해가 됐다. 단체생활 알레르기가 있지만 적당히 프로그램에 참여하되, 부담스러운 건 살짝 빠지면서 나름 재미난 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내게 그라뇽을 추천하느냐고 물으면? 추천. 극 내향형도 요령만 있으면 일과가 반복되는 순례길에서 충분히 특별한 하루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에 미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 번이면 충분한 것 같아요.'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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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헤라 (Najera) → 그라뇽 (Gra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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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침대 <Albergue de Peregrinos de Parroqu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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