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가 익기 전에 내가 먼저 익어버릴 것 같아

Day10 로그로뇨 → 나헤라

by 게으른여름
2025.7.10 (Thu) | 33° | 6:20 ~ 15:00 (8h 40m) | 29.9km


지난밤 자정 넘어까지 골목에서 소리 지르면서 놀던 아이들 때문에 일찍 잠들지 못했다. 이 동네는 저런 애들을 왜 그냥 두는 거야? 창문에 대고 '왓 타임 이즈 잇 나우!!' 할 뻔..


오늘은 지금까지 중 가장 긴 여정이다. 날이 뜨겁기 전에 더 걸어보려고 일찍 출발하고 싶었지만 동네 아이들 때문에 실패한 것 같다. 어제 하루를 쉬었고 같은 일정으로 걷던 사람들이 모두 앞서 갔기 때문에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역(자치주)이 바뀐 것이 확 느껴지는 게 그전까지는 대부분의 길이 비포장도로였지만 오늘은 도시를 벗어나도 포장된 도로가 계속 이어졌다. 라 리오하(La Rioja) 지역이 와인이 유명하다더니 와인으로 걷은 세금을 도시정비에 잘 사용하고 있는가 보다. 같은 이유로 오늘 걷는 길의 절반 이상이 포도밭 길이다. 걷다가 잘 익은 포도를 보면 따서 먹기도 한다는데 지금은 이제 막 포도 모양을 내는 단계이다.


나의 정보와 관심은 편향적이다. 궁금한 것만 집착적으로 정보를 찾아보기 때문이다. 이제 길을 좀 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오늘 길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아보지 않았다. 때문에 중간에 경유하는 마을이 단 한 곳뿐이고 그늘도 쉴 곳도 없는 길을 걷는다는 것을 직접 겪으면서 알게 됐다.


30도가 넘는 땡볕 아래를 걸어가는 것은 불가마 안을 걷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백팩에 넣어둔 아쿠아리우스(이온음료)가 꺼내서 마실 때마다 점점 미지근해지더니 나중에는 따뜻해졌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차를 마시는 것처럼 따뜻했다. 광활한 포도밭 사이를 걷다 보니 식수대조차 없어서 걷는 모두가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마주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서로 힘들어서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각자 속도로 걷다가 조그만 그늘에서 다시 만나는 것의 반복이었다.


목적지인 나헤라에 다다랐을 때쯤 너무 목이 말랐다. 가방 안의 따뜻한 아쿠아리우스는 더 이상 먹고 싶지 않고 시원한 콜라 생각이 간절했다. '무조건 처음 보이는 바에 들려서 콜라를 마셔야지!' 온통 콜라 생각만 하며 걸었다. 땀이고 진이고 다 빠져서 힘없이 스틱을 바닥에 찧으면서 걷는데 사람들이 길가에 멈춰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냉장고가 있었다. '어제 먼저 떠난 사람들이 얘기했던 그 냉장고다!' 도네이션 냉장고. 순례자를 위한 음료와 과일이 채워진 냉장고에 원하는 만큼 기부를 하고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혹시나 하고 열어보니 역시 콜라가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신자는 아니지만 이 길 위에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거겠지? 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열어봐서 그런지 냉장고가 성능이 좋지 않은 건지 안에 들어있는 음식들이 그리 시원하진 않지만 급한 불을 꺼줄 정도는 됐다. 여기까지 뜨거운 음료를 먹으면서 왔는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콜라를 마시고 갈증이 가시지 않아 자두도 하나 꺼내 먹었다.


오아시스 같은 냉장고를 떠나 마을 안쪽 깊숙한 곳의 공립 알베르게 까지는 한 시간을 더 걸었다. 도착까지 버텨보자고 잡고 있던 정신을 동네 입구에서 다 왔다고 놓아버렸다. 이런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는 게 두 배는 더 힘든 것 같다. 부지런한 여름 순례자들에게 3시는 일과를 마치고 낮잠을 잘 시간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마당의 빨랫줄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설마 내 자리 없겠어? 체크인을 하고 보니 3개 남은 침대 중 하나를 배정받았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게다가 오늘 알베르게는 에어컨도 있다.


계속 물에 들어가고 싶어서 기회만 보고 있는 중이었다. 길 건너에 공공 수영장이 있었지만 체력이 방전이라 물놀이할 에너지가 없다. 물놀이 대신 손빨래로 더위를 식혀보지만 빨래를 짜다가 식었던 열이 다시 오른다. 다음에 늦게 오면 그냥 세탁기를 써야지 다짐하며 빽빽한 빨래 줄에 자리를 만들어서 빨래를 널었다. 힘이 없어서 물기를 덜 짰어도 이 정도 태양이면 금세 다 마를 거다.


오늘 숙소엔 미현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귀여운 대만 친구와 함께 다녔다.(그래서 처음엔 같은 대만 사람으로 오해를..) 혼자 로그로뇨에 연박하면서 따로 걷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연박을 하면서 이전 사람들은 쉽게 마주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니 너무 반가워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간단한 또띠아로 때우고 음료만 마신 상태라 맛있는 저녁이 필요했다. 근처 맛집을 찾아 코스를 각자 다른 메뉴로 시켜서 나눠 먹었다. 후기에 양고기가 맛있다더니 정말 쯔란이나 민트 소스같은거 없이 그냥 고기만 먹어도 잡내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고된 하루를 해낸 것도 반가운 사람을 재회한 것도 맛있는 저녁을 먹는 것도 모두 좋았다. 기분이 좋아서 와인을 반 병 넘게 마셨더니 기분이 훨씬 더 좋아졌다.


미현은 내가 바라는 새벽 일찍 출발하는 성실한 순례자였다. 오늘 더위에 고생했으니 나도 내일은 5시에 출발할 거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했다. 우리 둘 다 내일 목적지가 같았다. 좀 유니크한 알베르게이다. 둘 다 극 I라서 기대 반 걱정 반. 그래도 함께 가는 사람이 있어서 걱정보다 기대가 조금 더 커졌다. 숙소로 돌아와 미현이 내게 멀티비타민과 가루로 된 포카리 스웨트를 주었다. 본인 몸 챙기기에도 벅찬 순례길에서 이런 나눔을 받으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에어컨이 있는 시원한 숙소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푹 자고

내일은 일찍 일어나 보자.



로그로뇨 (Logrono) → 나헤라 (Najera)


오늘의 침대 <Albergue de Peregrinos de Naj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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