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9 로그로뇨→빌바오→로그로뇨
2025.7.9 (Wed)
오늘은 쉬는 날이다. 순례길 시작 이후 첫 휴가를 갖게 됐다.
대도시인 로그로뇨(Logrono)는 버스 터미널이 있기 때문에 근교 여행이 수월하다. 도시재생의 성공사례인 빌바오(Bilbao)를 가보고 싶기도 했고 팜플로나(Pamplona)의 산 페르민 축제도 가보고 싶어서 뭐가 되었든 이곳에 하루 더 머무르기로 결심했다.
하루에 두 곳을 모두 다녀오는 건 무리일 테고 어디를 가는 것이 후회 없는 선택일지 고민이 됐다. 산 페르민은 입고 갈 흰옷도 없고(TPO에 진심인 편) 소극적인 내가 사람에 치여 제대로 구경도 못할 것이 눈에 훤해서 빌바오를 가기로 결심했다. 오늘은 관광객 모드로 변신! 하고 싶지만 옷이 없다... 완벽한 등산객의 행색이지만 나름 애슬레저룩이라 합리화를 해본다.
배낭을 메고 갈 순 없으니 유료락커를 찾아볼까 하다가 묘안을 생각했다. 오늘 다시 공립 알베르게에서 잘 계획이니, 이곳 동키 보내는 짐을 놓는 곳에 내 배낭도 놓고 떠나버리는 것이다. 동키 회사는 자신들의 봉투가 붙어있는 가방만 픽업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은 내 배낭은 자연스레 남겨지게 되고, 이후에 새로 들어오는 가방이 옆에 놓이면 내 것도 오늘 들어온 가방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들어있는 배낭을 무책임하게 버리고 오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넌 무거워서 데리고 갈 수 없어.
빌바오행 7:30 버스를 타면 여유 있게 구경하고 돌아올 수 있을 듯했다. 어제 자기 전 구글맵으로 버스터미널을 미리 검색해 두었다. 다녀왔던 아시안 마트와 멀지 않았다. 한번 가봤다고 길이 익숙하다. 여유를 부리며 목적지에 도착했더니 아무리 둘러봐도 터미널이 없다. 다시 맵을 살펴보니 '버스 터미널'이 아니고 '버스 연대'의 사무실이었다. Autobus만 보고 착각을 한 것. 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다. 검색해 보니 멀지 않은 곳이라 서둘러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에도 터미널이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3년 전 후기가 마지막이고 이곳은 더 이상 터미널이 아니란다. 로그로뇨가 갑자기 너무 낯설다. 마음이 급해져 근처 택시 아저씨에게 ChatGPT를 이용해서 스페인어로 길을 물었다. 그냥 스페인어로 말씀하셔도 되는데 손짓 발짓으로 길을 알려주신다. 알려주신 길로 찾아가니 멀리서 보아도 구르면서 보아도 터미널처럼 생긴 건물이 보였다.
7:30 버스는 포기. 내가 탔어야 한 버스가 지금 막 문을 닫고 떠나고 있었다. 표를 끊지 않아서 붙잡지도 못하고 떠나보낸다. 다음 버스까지 두 시간의 여유가 생겨서 '밀렸던 일기나 쓰지모. 오히려 좋아' 긍정 마인드를 가져본다. 터미널에 오니 산 페르민에 놀러 가려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팜플로나가 멀어져서 축제와도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얼마큼 걸어야 이 흰옷이 보이지 않을지 궁금하다.
두 시간을 달려 빌바오에 도착했다. 터미널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스페인의 대도시들과는 또 다른 현대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빌바오는 재정자립도가 높은 부자 도시이자 카탈루냐처럼 독립을 원하는 바스크 지방의 대표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유럽 스럽긴 한데 스페인 느낌은 아닌듯한.
이곳의 방문 목적이기도 한 구겐하임 뮤지엄(Guggenheim Museum)까지는 트램을 타고 가기로 했다. 무인 발권기에서 티켓을 뽑아 인증사진까지 찍고 탑승했는데, 승차 태그를 탑승 후가 아닌 정거장에서 했어야 했다. 뜻하지 않게 무임승차를 해버렸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네르비온 강가에 위치한 구겐하임 뮤지엄은 2-3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는 적당한 규모의 미술관이었다. 명성처럼 그 자체로 번쩍이는 티타늄에 둘러싸인 독특한 건물이지만 앞마당엔 그 존재감을 압도해 버리는 거대한 제프 쿤스의 Puppy 조형물이 포토존으로 쓰이고 있다. 모두 예쁘게 입고 한껏 포즈를 취하고 있는 곳에서 비록 등산복 차림이지만 옆 사람에게 부탁해 나도 사진을 하나 남겨보았다.
*구겐하임 빌바오를 건축해 쇠퇴한 빌바오를 문화예술도시로 다시 태어나게 한 일등공신 프랭크 게리(Frank Gehry)는 최근 지병으로 별세했다.
퍼피만큼이나 이곳의 상징적인 작품인 리차드 세라의 The Matter of Time은 8종류의 철제 조형물이다. 거대한 강철판을 이런저런 다른 모양의 곡선의 형태로 만든 시간을 물리적으로 표현해 놓은 작품이라고 한다. 작품을 체험하는 동안 재료가 주는 중압감과 폐쇄적인 구조로 무력감과 공포가 느껴졌다. 내가 시간문제를 겪고 있어서 그런가.. 상설 전시 섹션은 유명한 작품이 많아서 회전초밥집에서 금테가 둘러진 접시만 골라 먹는 기분이었다. 마크 로스코나 로이 리히텐슈타인, 바스키아, 앤디 워홀, 잭슨 폴락.. 등등 상설 전시만 보고 돌아가도 아쉽지 않을 구성이다. 기획전시는 여성작가 기획전인지 헬렌 프랑켄탈러와 바바라 크루거를 전시 중이었다. 크루거는 한국에서 봤던 것과 작품이 비슷했지만 구겐하임이라는 배경에 놓이니 뭔가 더 힙한 느낌이다.
이 큰 미술관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줄을 서는 곳이 있었다. 바로 쿠사마 야요이의 'Infinity Mirror Room'이다. 같은 작품을 한국에서도 줄을 서서 기다려서 봤던 적이 있다. 현장에서 온라인 예약을 한 뒤 10분 전에입장 줄에 대기하면 순서대로 입장을 시켜주었다. 야오이의 땡땡이가 가득한 자그마한 무한 거울의 방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들어가 각자의 사진에 서로를 남기면서 뻘쭘히 있다가 문을 열어주면 나왔다.
빌바오 시티투어 버스는 뮤지엄 바로 앞에서 출발한다. 로그로뇨로 돌아가는 버스 탑승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투어버스 소요시간은 55분으로 겉핥기 관광에 탁월한 선택이다. 핵심 관광지 11곳을 둘러보는 코스이고 24시간 내에 자유 탑승이 가능하다. 구겐하임을 비롯해 산 메메스(San Mames) 스타디움, 극장, 성당, 시청, 대학 등 전반적으로 돌아본 도시는 한때 쇠락한 곳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인 건축물이 가득한 활기찬 도시였다. 걸어 다니며 더 가까이 느끼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사람이고 도시고 밥을 먹어봐야 잘 알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눈으로만 보고 돌아선다. 2시간만 일찍 왔어도.. 빌바오는 까미노 북쪽 길 루트기도한데 다음 기회를.. 이 가능할까?
짧고 굵은 빌바오 여행을 마치로 로그로뇨로 컴백. 공립 알베르게로 다시 돌아와 '나 기억하니 다시 왔어'하고 연박을 시도했다. '무슨 문제 있어?' 묻길래 '무릎이 아파서 오늘 쉬고 내일 걸을라구' 하니까 끄덕끄덕 하시며 체크인을 해준다. 어제와 같은 방 다른 침대에 짐을 풀었다.
오늘의 휴가로 내일 해이해질까 봐 29km의 도시로 동키를 냅다 신청해 버렸다.
내일은 다시 순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