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8 로스 아르코스→로그로뇨
2025.7.8 (Tue) / 25°
6:10~15:40 / 9h 30m / 28km
포뇨도 아니고 로그로뇨(Rogrono)라니! 오늘은 너무 귀여운 이름의 마을로 간다. 프랑스길의 두 번째 대도시다. 그리고 오늘이 지금까지 중 가장 긴 여정이다. 겨우 4-5km 길어지지만 항상 마지막에 힘에 부치기 때문에 5km 정도면 내겐 1톤 급 압박감이다.
오늘은 어제 위아래 침대에 나란히 배정되었던 혜진 모자와 함께 떠났다. 혜진은 물론 초등학생인 아들 지우까지 100대 명산을 완등한 배테랑들이다. 아침이라 기운이 넘치는 등산 영재 지우는 놀러 나온 것처럼 신나게 걷는다. 지우는 엄마 혜진의 길동무이자, 포토그래퍼이자, 맛집 메이트였다. 나와 또래인 혜진이 자기 몫을 해내는 아들과 함께 걷는 것을 보면 새삼 내 나이를 깨닫게 된다. 내 또래는 이런 장기여행에서 쉽게 만나기가 어렵다. 자식을 케어하거나 회사에서 관리자로 한창 바쁠 나이기 때문이다. 떠나와서야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어느 하나 이룬 것이 없구나. 현실을 마주하면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 뿐이다.
'너는 무슨 인생 망했다는 생각을 발바닥 아플 때 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발이 너무 아파서 한국의 현실이 아닌 지금의 현실로 되돌아오게 된다. 자는 것도 씻는 것도 먹는 것도 다 적응이 됐는데 발은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며칠째 종종 마주치는 필립은 나를 보면 '부엔 까미노'가 아니라 '아유 오케이'라고 물어본다. 심지어 발바닥이 아파서 쉬고 있을 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내게 다리를 다쳤냐고 물어보셨다. 절뚝거리는것도 아닌데 내가 걷는 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남들이 왜 그렇게 물어보는지 알 수가 없네.
초반 페이스는 남들과 비슷하거나 평범한데 항상 중간부터 속도가 뚝뚝 떨어진다. 오늘은 급기야 졸음이 쏟아졌다. 뜨끈한 온도와 따스한 햇살 아래 반 수면 상태로 희미하게 눈을 뜨고 한참을 걸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 거리는 지경이 되니 말을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한국에 있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동안 통화하면서 천천히 걸어갔는데, 나중에 듣기론 어느 아주머니가 혜진에게 '너 일행이 뒤에서 통화하면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넓고도 좁은 순례자 커뮤니티.
잠이 좀처럼 깨지 않아 마지막 경유지인 비아나(Viana)에서 뭐라도 먹고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심했다. 바에서 또르띠아를 주문했는데 매운 소스를 주냐고 물어본다. '매운 거?' 갑자기 매운 것이 급 당겼다. 매운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에 강렬히 사로잡힌 채로 또르띠아를 먹으며 차편을 검색해 보니 슬프게도 비아나에서 다음 마을이자 목적지인 로그로뇨까지 가는 버스는 4시간 뒤에나 온다고 한다. 4시간이면 개미도 도착하겠다. 점프를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로그로뇨에 가면 매운 것을 꼭 먹겠다는 마음 하나로 까미노 루트를 무시한 채 구글맵을 켜고 걷기 시작했다.
보통 까미노 루트는 동네를 경유하게 되어있고 동네 안에서도 성당을 들르게 짜여 있다. 당연하다. 순례길이니까. 나는 그 길을 무시하고 비아나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도의 갓길을 따라 걸었다. 국도와 같은 도로라 차들의 속도가 상당했지만 별수 없어 최대한 가장자리에 붙어 걸었다. 갓길이 점점 좁아지고 그냥 선만 남았을 정도에 순례길과 다시 만났다. 계속 차도를 따라가면 가면 더 빠르겠지만 오늘 죽고 싶진 않기에 다시 순례길에 합류했다.
걷다 보니 순례길 표식이 바뀐 게 눈에 띄었다. 광역자치주가 바뀐 것이다. 비아나 까지는 나바라(Navarra)였고 로그로뇨에 가까워 오면서 라 리오하(La Rioja)로 바뀌었다. 그간 많이 걷긴 했나 보다.
시간이 늦었지만 일단 공립 알베르게로 찾아갔다. 긴장하며 잘 수 있냐고 물어보니 친절한 할아버지 자원봉사자 분이 가능하다고 맞아 주셨다. 열 시간 가까이 걸어 지칠 대로 지쳐있는데 배정받은 방은 3층에 있었고 이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울고 싶지만 어쩌겠나 올라가야지. 적당히 낡았고 적당히 깨끗한 이곳은 부분 부분 리모델링 중이었다. 그것 때문인지 화장실 겸 샤워실을 남녀 공용으로 사용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샤워를 대부분 마친 시간이라 혼자 쓸 수 있었다.
체크인할 때 2층침대의 위아래 중 고르라고 하기에 2층에 오를 기운이 없을 것 같아 아래를 쓰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침대.. 2층이 너무 낮아서 침대엔 앉을 수가 없고 눕는 것만 가능하다. 평소처럼 2층 할걸.. 오늘은 혜진과 아들, 재형이 같은 숙소에 묵는다. 넷이 저녁거리를 사 와 숙소 주방에서 함께 먹기로 했다.
로그로뇨는 비교적 큰 도시라 아시안 마트가 있었다. 매운 것을 먹기로 결심했으니 오늘 저녁은 신라면과 불닭 떡볶이다. 사실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고 싶었는데 고추장을 자취생도 안 살 큰 사이즈만 팔아서 아쉬운 데로 불닭 떡볶이를 선택했다. 열흘 만에 먹는 매운 음식은 예상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야근하고 집에 돌아와 시켜 먹던 엽떡만큼은 아니지만 지친 몸을 잠시 잊을 정도는 됐다. 로그로뇨는 원래 타파스바가 유명한데 빨리 쉬고 싶기도 했고 자극적으로 먹고 나니 다른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들이 로그로뇨에서 뭐 먹었냐고 물어보면 타파스 종류가 아닌 불닭 떡볶이를 먹었다고 대답해야겠지만 내게 로그로뇨는 매운맛이다.
내일은 로그로뇨에 하루 더 머무를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마주쳤던 사람들과는 오늘이 마지막이다. 순례길의 첫 챕터에서 만난 반가운 사람들. 나는 내향적이기도 하고 사람을 상대하는데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기회가 있으면 굳이 피하지 말고 마음을 열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보자는 소극적인 다짐을 했었다. 처음에 뾰족한 사람을 만났다면 다시 마음을 닫아버렸을 텐데 운이 좋게도 모두가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길에서, 아니면 산티아고에서 조우하기를..
모두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