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7 에스떼야 → 로스 아르코스
2025.7.7 (Mon) / 23°
5:55~13:10 / 7h 15m / 21km
손이 닿지 않는 높은 벽에 위치한 창문이 살짝 열려있어 밤새도록 그곳에서 찬바람이 들어왔다. 한 여름의 까미노라도 추위를 많이 타는 내게 침낭이 아닌 침낭라이너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듯하다. 추위에 뒤척이다 일어나 비몽사몽 한 상태로 출발 준비를 했다. 벌써 많은 사람이 길을 떠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바나나를 미리 한 개 사놓고 아침에 먹고 있다. 초반에 겪었던 가슴이 저리거나 식은땀이 나는 증상은 더 이상 없지만 혹시 모르니 공복상태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으려는 대비책이다.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심적으로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기분이 든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 깜깜한 어둠이다. 차갑게 내려앉은 새벽의 공기를 스틱으로 가르며 해가 달아오르기 전 더 빨리 더 멀리 걸어야지 조바심을 내어 길을 나섰다. 십 분쯤 지났을 때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해 삼십 분쯤 지나니 완전한 아침이 되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문을 연 바들이 몇 개 보였다. 커피를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참고 계속 가보기로 했다.
오늘 이동 경로 중에 필수 코스처럼 순례자들이 들리는 장소가 두 곳이 있다. 아예기(Ayegui) 마을의 대장간과 이라체(Irache)의 와인 수도꼭지이다. 금속공예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대장간은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와인 수도꼭지는 구글맵엔 8시부터 운영한다고 안내가 되어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빈 생수통을 챙겨 나왔다. 6시 40분쯤 도착해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 나오지 않는 와인. 꼭지를 열었다 잠갔다 하는데 옆 사람이 사진을 찍어주냐고 물어보았다. 혼자 여행을 나와 풍경을 찍고 있으면 네 사진을 찍어주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마다 괜찮다며 거절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런 여행은 내 사진이 별로 남지 있지 않았다. 버릇처럼 괜찮다고 말하려다 이번엔 흔쾌히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쌩얼의 부시시한 모습이지만 나만 보는 건데 뭐 어때.
이라체를 떠나기 전 갈림길을 만났다. 정석 루트와 1km 정도 단축되는 지름길이다. 찾아보니 지름길이 숲길을 지나는 길이고 풍경이 괜찮아 보여 지름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가보지 않은 길은 알 수가 없지만 내가 선택한 길은 산속 오솔길을 지나 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이라 경치가 정말 좋았다. 대안 루트다 보니 대부분 인적이 드문 산길을 혼자 걸어야 했는데 불안함 덕에 조금 더 빠르게 걸을 수 있었다.
산을 내려오니 루퀸(Luquin)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왔다. 문을 연 바를 만나 잠깐 쉬어 가기로 했다. 가게 한쪽에 놓인 텔레비전에서는 산페르민 현장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오늘 아침 소몰이 행사를 다시 보여주는 것을 보며 아침을 먹었다. 10마리의 크고 작은 소가 좁은 골목의 시작점에서 달려 나오면 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소에 받히지 않고 달리는 스릴을 즐기는 생존 게임이다. 물론 축제의 일부 프로그램 이긴 하지만 이 단순하고 무식한 행사가 몇 세기에 걸쳐서 이어져 오고 있다니. 사람이 죽어나가도 문제없이 행사를 지속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의 국민성이 무엇일까 새삼 궁금하면서 그 포용력이 부럽기도 했다.
대안길이 다시 메인 루트와 합쳐지는 지점에서 시현과 재형 일행과 마주쳤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치니 더 반갑다. 지름길로 오지 않았다면 나보다 속도가 빠른 이들을 따라잡지 못했을 거다. 아침부터 흐린 날이 개면서 쨍한 파란 하늘 아래로 하얀 구름이 낮게 깔리고 그 아래 드넓은 금빛 밀밭이 펼쳐진 풍경이 장관이었다. 풍경이 멋있다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베스트 컷이다. 나의 선택과 우리가 만난 타이밍과 멋진 풍경의 길과 좋은 날씨의 하모니가 완벽했다.
뉴질랜드 커플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볼 때마다 반갑고 기분 좋은 사람들이다. 둘은 오늘 나보다 두 마을이나 더 간다고 한다. 이렇게 일정이 틀어지다 보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이들을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함께 찍고 인스타그램도 주고받았다.
오늘의 숙소도 공립 알베르게이다. 까미노 어플에 총 베드 수가 60개 정도로 안내되어 있어서 여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왔는데 건물 하나가 통째로 공사 중이라 사람을 반만 받았다. 오늘 많이 쉬지 않고 서둘러 걸은 덕에 침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어제 로르카에 숙박했던 나보다 10km는 더 걸어온 혜진 모자가 도착하며 마지막으로 체크인.
다른 날보다 일찍 도착해 시에스타에 걸리지 않고 여유롭게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배부르게 먹고 싶어서 메뉴 델 디아 맛집을 찾아갔다. 현지인이 많은 걸 보니 제대로 왔다 싶었다. 15유로에 에피타이저, 메인 요리, 후식, 음료가 포함된 코스인데 메뉴 해석이 쉽지 않아 GhatGPT로 번역해서 주문을 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파파고에 의지했는데 지피티를 활용하니 훨씬 편해졌다. 통역도 맥락까지 살려서 해주고 메뉴판이나 안내판도 제대로 번역해 주고 말이다. 샐러드와, 스페인 전통 요리라는 고기찜과, 푸딩, 작은 병이긴 해도 와인까지 한 병을 싹 비웠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모처럼 점심을 먹었더니 이 마을에 머무는 한국 분들이 저녁을 함께 모여서 먹자고 했다. 저녁에 먹으려고 프로틴이 들어있는 요거트도 사놨고 점심 먹은 배가 꺼지지도 않았지만 같이 어울리고 싶어서 자리에 합류했다. 와인을 따로 주문했는데 테이블당 코스에 포함된 와인이 무제한 제공이라 얼떨결에 와인을 얻어먹게 됐다. 그동안 컨디션 조절한다고 무알콜 맥주만 한번 마시고 술을 전혀 안 마셨는데 점심, 저녁 와인을 마셨더니 취기가 오르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은 밖이 대낮 같이 밝긴 하지만 참 기분 좋은 밤이다.
이 기분으로 늦게까지 푹 자고 쉬면 참 좋겠네
하지만 내일은 28km를 걸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