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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Day5 팜플로나→푸엔테 라 레이나

by 게으른여름

2025.7.5 (Sat) / 30°

5:40~13:40 / 8h / 25km


오늘은 이름이 예쁜 도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로 간다. 숙소는 사립 알베르게로 예약해 두었다.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는데) 숙소 예약을 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고민이 너무 많았다. 여행에서 계획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미리 정해 놓는 것이 오히려 불안한 사람이다. 팜플로나까지는 꼭 예약을 하라는 의견이 많아서 수비리까지 예약을 해놓고(팜플로나 공립은 예약이 불가) 출발 며칠 전 혹시나 해서 취소가 가능한 옵션으로 오늘 일정도 예약을 해뒀다. 겪어보니 보르다 빼고는 모두 예약을 안 해도 됐었다. 성수기라 잘 곳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은 순례자가 많이 없는듯하다.


팜플로나 공립 알베르게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자는데도 소음이나 환기문제로 고생하지 않고 깊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알람이 울리기 전 사람들의 준비 소리로 잠이 깨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왔다.


이곳에서 동키를 보내려면 1유로짜리 사물함에 배낭을 넣고 사물함 열쇠를 리셉션의 해당 동키회사 이름이 쓰인 미니박스에 맡겨야 했다.(동키회사는 여러 곳이다.) 열쇠를 맡기고 출발하기 위해 문을 열었더니 비가 꽤 내리고 있었다. 그냥 맞기엔 흠뻑 젖을 정도라 열쇠를 돌려받아 사물함의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고 다시 1유로를 넣고 사물함을 잠근 뒤 열쇠를 맡겼다. 그 시간이 다 해서 10분 정도 됐을까? 막상 우산을 들고 나오니 비가 거의 그쳐서 우산이 필요 없어졌다. 오늘의 시발(始發) 비용을 제대로 지불했네.


팜플로나를 벗어날 즘 재형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금세 5km를 돌파했다. 아침엔 속도가 잘 나는구나 싶어서 내친김에 많이 쉬지 않고 6km를 더 걸어 용서의 언덕(엘 페르돈, El Perdon)까지 올랐다. 프랑스 길의 포토스팟 중 하나이지만 여러 매체를 보면서 기대했던 것만큼 특별한 풍경이나 순간은 아니었다. 바람이 엄청났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도 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곳이라고도 하던데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이 정신없이 불어 이곳에서 뭘 해야 하는지 내 정신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결국 나는 용서를 빌지도 받지도 못하고 인증 사진만 냅다 찍고 내려온 관광객이 되었다.


수비리 직전 하산길이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오늘 용서의 언덕을 내려오는 길이 더더더 힘들었다. 수비리 가는 길이 거대한 울퉁불퉁한 돌덩이 었다면 이곳은 긴 내리막길 내내 크고 작은 자갈이 깔려있었다. 이런 경사라면 아래로 다 쓸려 갔어야 할 텐데 말이 안 된다.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줄 알았냐. 너의 소원을 들어줄 테니 대가를 치러라'라는 신의 뜻이 아니고서야. 미끄러지고 발목이 돌아가고 자잘한 돌이 신발 속으로 들어와 몇 번을 멈춰서 돌을 빼내야 했다. 스패츠도 챙겨 왔지만 정작 동키로 보낸 배낭에 넣어두어서 써먹지도 못했다. 이렇게 없어도 다 사는데 쟁여 놓은 물건이 얼마나 많을는지.


1시가 넘어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했지만 예약한 숙소는 마을 초입에서 한참 들어간 곳이었다. 도착했는데 도착이 아니야.. 오늘 숙소에는 재형과 시현 모녀와 함께 머물게 되었다. 씻고 빨래를 끝내고 보니 역시 시에스타에 걸렸다. 함께 걸어온 재형과 문을 연 식당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녔다. 한 곳을 찾아서 들어가니 주말 메뉴판을 내준다. 오늘이 주말인 줄도 몰랐는데. 코스 메뉴가 20유로가 넘어 살짝 고민이 됐지만 지인이 잘 다녀오라며 준 용돈 20유로를 여기서 쓰기로 했다. 소고기를 먹으면 기운이 좀 더 나지 않을까 싶어서 5유로를 더 보태서 얼굴만 한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저녁을 먹고 돌아와 시현 모녀와 만나 어머니가 사주신 맥주를 마시며 넷이 숙소 키친에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시현의 언니는 나와 이름이 같았고, 재형의 누나는 시현과 이미지가 비슷해 볼 때마다 자꾸 누나 생각이 난다고 했다. 뭐 어떻게든 연결고리가 있다며 반가워한다. 밝고 유쾌한 사람들을 만나니 나까지 밝아지는 것 같다. 최근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은 내 상황을 토로하며 걱정과 스트레스를 전염시키는 것이 다였는데. 걷는 시간도 이런 시간도 모두 나에겐 힐링이다.


작고 소소한 즐거움이 모여 행복한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런 소소한 기쁨이 계속 함께 하기를.



팜플로나(Pamplona) →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오늘의 침대 <Albergue Pu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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