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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축제의 도시 팜플로나

Day4 수비리→팜플로나

by 게으른여름

2025.7.4(Fri) / 30°

5:40~14:40 / 9h / 23.4km



오늘은 대도시인 팜플로나(Pamplona)로 간다. 더위를 피해 동이 트기 전 다인과 함께 길을 나섰다. 마을을 벗어나는 길이 어둡고 한적했기 때문에 혼자 나왔으면 무서웠을 것 같다. 수비리를 벗어나자 어스름한 새벽의 풍경 속에 오징어잡이 배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는 공장지대가 나왔다. 마그네사이트라는 나에게는 생소한 광물을 가공하는 곳이었다. 저곳은 시에스타가 없겠지? 느긋한 스페인 사람들인데 밤낮없이 돌아가는 공장에서는 어떤 사람이 일을 하고 있을까.


다인과는 아침을 함께 먹기로 했기에 두 시간쯤 걸어서 순례길에서 살짝 벗어난 마을 라라소아냐(Larrasoana)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 있던 레스토랑이 모두 문을 닫았기에 문을 연 곳을 찾다 보니 마을 안으로 계속 들어갔는데 다들 아까 그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신기하게도 출근 시간인데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을의 끝에 다다라서 문을 연 바를 만났다. 만국기가 드리워진 글로벌 친화적으로 보이는 이곳엔 한국말로 친절하게 맞아주는 주인아저씨가 있었다.(한 문장만 외워서 반복하시는 느낌이긴 했지만..) 추천해 주신 세트메뉴를 시켜서 먹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다가와 자신의 폰에 있는 영상을 보여주셨다. 이곳에서 노래하는 한국남자인데 유명한 사람이란다. 멜로망스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영상 속 그분이 너무 쌩얼이라 진짜 김민석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김민석 산티아고를 검색하니 나오는 게 없어서 한국에서 유명한 노래를 불러준 것을 오해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라라소아냐를 나와 숲길을 걷는 중에 세분의 한국인 어르신 일행을 만났다. 언니분과 속도가 맞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는데, 뉴질랜드에서 오셨고 예전에 프랑스 길을 완주하신 경험이 있다고 하셨다. 그때는 일정에 쫓겨 빨리 걸었는데 이번엔 동생 부부와 쉬엄쉬엄 걸으실 거라 했다. 딸과 아들이 각각 다른 외국에 살고 있는데 딸이 나와 동갑, 아들은 우리 언니와 동갑이었다. 지난해 딸이 결혼을 했다고 하시는데 내 나이에 결혼이라니 얼마나 기쁘셨을지 짐작이 됐다. 나는 미혼이고 엄마가 몇 해 전 돌아가셨다고 하니 어떻게 눈을 감으셨겠냐며 안타까워하셨다. 이래저래 엄마 생각이 많이 나는 순례길이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계곡이 나왔는데 이곳에서 모두와 다시 만났다. 혜진과 아들, 대학생 딸 시현과 어머니, 다인, 어르신들 세분과 나까지. 이쯤 되면 한국 산악회다. 먼저 도착해 있던 시현이 계곡에 발을 담그고 너무 시원하다며 들어오라고 했다. 발바닥이 아프다 못해 뜨거운 지경이라 열이라도 식히자는 생각에 물로 들어갔다. 물속은 얼음처럼 차가웠는데 넣는 순간 발의 고통이 싹 사라졌다. 제니가 이 맛에 콜드 플런지를 하는구나. 출발한 지 세 시간쯤 지나서 슬슬 지쳐갔는데 발이 개운해지니 리셋된 기분이다.


걸음이 느린 어르신들은 천천히 걷고 나머지는 일행이 되어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함께 바에 들러서 또르띠아와 콜라도 먹고 길에서 만난 스페인 경찰에게 쎄요(Sello,스탬프)도 받았다. 그렇게 팜플로나까지 함께 갈 줄 알았지만 얼마 못 가 뒤처지고 다시 혼자 걷게 되었다.


1시가 넘어서 도시 같은 마을에 도착했는데 아직 팜플로나는 아니고 비야바(Villava) 란다. 사실 여기서 버스를 너무 타고 싶었다. 실제로 내 눈앞에서 여러 순례자가 버스에 타기도 했다. 동키를 보내든 버스를 타든 하나만 하자. 둘 다 하는 건 너무해. 양심을 챙겨서 쥐어짜 낸 힘으로 한 발씩 내디뎌 본다. 문득 서울 한복판에 등산 스틱을 의지해 힘겹게 걷는 이방인을 상상해 보았다. 얼마나 이질적이고 이상할지.. 부끄럽지만 가슴을 펴고 자연스럽게 걸어 볼 기운이 나지 않는다. 남은 1,2km가 몇십 킬로 같다.


오늘의 숙소는 옛 성당을 개조한 공립 알베르게로 선착순 입실이다. 성수기(성 야고보(=산티아고) 축일인 7.25에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일정)를 살짝 벗어난 덕에 순례자가 그리 많지 않아 거북이처럼 느리게 도착해도 남은 침대가 많았다. 성당이다 보니 층고가 굉장히 높았고, 복도식으로 층이 나눠진 특이한 구조였다. 실제 모습이 궁금해서 꼭 와보고 싶던 곳이다. 이 숙소가 사랑스러운 진짜 이유는 세탁기 사용이 공짜, 건조기는 1유로밖에 하지 않는다. 지친 걸음 끝에 빨래를 해야 하는 건 매일의 루틴이자 적응할 수 없는 괴로움이다. 아까 함께 걸었던 분들이 다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세탁기 순서를 기다리느라 많이 늦을 것 같아 따로 먹겠다고 했다.


빨래를 마친 후에 재형과 민철님도 저녁을 먹기 전이라고 해서 함께 하기로 했다. 근처에 식당이 너무 많아서 선택이 어려운 나로서는 혼란스러웠지만 두 사람은 뭐든 다 좋단다. '유명한 곳으로 가자' 헤밍웨이 카페로 갔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돌아 나와 앞사람들이 간다던 타파스 바(Tapas Bar)로 갔다. 진열된 음식을 선택하여 주문해야 하는데 잘 몰라서 메뉴를 추천해 달라고 하니 푸아그라가 베스트라고 해서 시켜보았다. 푸아그라는 파인 다이닝에서나 먹는 음식인 줄 알았는데. 푹신하고 사르르 녹는 식감과 짜고 고소한 맛이 인상적이었지만 비윤리적인 식재료니 이렇게 경험해 본 것으로 됐고 다음엔 그냥 순대 간을 먹는 걸로.


팜플로나는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이다. 그는 이곳에서 열리는 산 페르민 축제에 8번이나 참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뒤가 바로 그 산 페르민 축제. 축제를 기다리는 들뜬 분위기가 도시 전체에서 느껴졌다. 스페인 3대 축제라 하니 그럴 만도 하다. 거의 모든 상점에서 축제 관련 물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 축제는 흰옷에 빨간 스카프를 두르는 것이 국룰. 축제 기간엔 공립 알베르게는 문을 닫고 숙박비는 10배가 올라간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소몰이가 진행되는 골목의 2층 테라스 집들은 몇백 유로씩 받는데도 일찌감치 예약이 끝나 버린다고 한다. 내가 처음 계획한 일정은 축제와 겹쳤었는데 공립 알베르게에 머물 수가 없고 앞 뒤 마을까지 숙소 예약이 끝나거나 비싸서 고민하다가 결국 일정을 조정했다.(비행기를 바꿨다.) 궁금하긴 한데 기회가 된다면 옆 동네에서 구경이라도 와야겠다. 열심히 며칠을 걸어갔대도 차로 한두 시간 거리일 테니.


이곳의 사람들은 축제가 시작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고 나는 내 몸이 이 길을 걷는 것을 적응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보통 일주일쯤 걸으면 적응이 된다고 하니 산페르민이 시작할 쯤엔 나도 좀 나아지겠지. 아직까지는 사색하며 걷는 순례길이 아니라 혹서기 훈련에 온 것만 같다.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은 업보빔을 제대로 맞는 듯하다. 열심히 걸어서 업보청산 합시다. 내일은 부디 좀 더 튼튼한 내가 되길.


오늘의 침대 <Albergue Jesus y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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