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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의 시작

Day2 보르다(오리손)→론세스바예스

by 게으른여름

2025.7.2 (Wed) / 20°

7:30~13:50 / 6h 20m / 17.9km



이렇게 피곤한데 왜 자꾸 새벽에 잠이 깨는지 모르겠다. 불과 며칠 전까지 성실한 직장인으로 살았기 때문일까. 시차 적응은 언제쯤 될는지. 주변에 식당이 없는 관계로 숙소에서 저녁과 아침을 제공해 주어서(물론 돈을 받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늦지 않게 조식을 먹으러 갔다. 어제 식사 자리에서 숙소 주인이 여러분은 앞으로 보르다 패밀리라고 명명했기 때문인지 하루 만에 모두 친해진 분위기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구석 자리에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안 쓰던 에너지를 모아 모아 짜내다 보니 당이 떨어지는 것 같다. 진짜 저혈당이라면 큰일이니 오늘은 공복을 만들지 않으려고 아침도 많이 먹고 도시락도 신청해서 샌드위치에 과일에 콜라까지 챙겼다.


오늘은 어제보다 기온이 10도 이상 떨어졌다. 쌀쌀한 공기를 마시며 마치 내 미래 같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운무가 짙은 길을 뚫고 나간다. 어제+오늘이 하루짜리 코스지만 지금까지 절반을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은 어제의 두 배를 걸어야 한다.


오늘부터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부엔 까미노(Buen Camino)‘도 열심히 했다. 초반이라 그런지 다들 인사를 나누지는 않는다.


2시간을 넘게 걸었을 때 푸드트럭을 만났지만 아침을 든든히 먹어서 그런지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가방에 샌드위치와 음료수도 있지만 아직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 확실히 어제 보다 컨디션이 나아졌다. 새 신발이 적응이 되지 않아 발바닥이 좀 아프지만 종종 앉아서 양말까지 벗고 쉬어주면 그런대로 또 괜찮아졌다.


절반쯤 걸으니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이 나왔다. 이름은 프랑스 길이지만 출발 당일에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셈이다. 이렇게 걸어서 국경을 넘나들어도 치안에 문제가 없는 걸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프랑스와 안녕한다.


어제는 근력이 필요했다면 오늘은 지구력이 필요한 날이다. 오르막이라도 어제보다 완만한 길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뚝뚝 떨어지고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1km만 더 가서 쉬자. 여기서 1km만 더 가보자 스스로를 달래면서 걸었다. 구름이 걷히면 풍경을 감상하며 걸었고, 구름이 다시 드리우면 발밑의 길을 보고 걸었다.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직전의 내리막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좀 더 빠르지만 가파르기 때문에 위험하고, 하나는 좀 더 돌아가지만 완만해서 안전하기 때문에 꼭 이 길로 가라고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추천해 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빠른 길을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거리를 비교해 보니 겨우 1km 정도 차이였다. 이 정도에 나의 안전을 걸 순 없지. 다시 완만한 길을 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내리막 전에 쉬는 곳에서 한국인 두 분을 만났다. 출발 이후 처음 만난 한국인이다. 두 번째 순례길이라는 한 분은 짧은 길로 간다고 했다. 나와 같은 돌아가는 길을 택한 재형은 군대를 갓 제대하고 한 달도 안 돼서 순례길에 왔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으니 정신이 딴 데 팔려서 그런지 내리막이라 그런지 힘이 덜 들었다. 마지막엔 길을 놓쳐 찻길로 내려와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알베르게에 무사히 도착했다. 도착하니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큰 수도원을 순례객들의 숙소로 개조한 론세스바예스의 공립알베르게이다. 오래된 수도원을 알베르게로 사용하는 곳들이 많이 있다. 수도자들이 예전만큼 많지 않아서일까? 신식 수도원을 지어서 오래된 수도원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일까? 거의 모든 순례객들이 이곳 공립 알베르게에 머무는듯했다. 입구에 긴 줄이 계속 멈춰 있었는데 알고 보니 순례자 QR을 등록하느라 딜레이가 되고 있었다. 등록을 완료한 사람부터 체크인하면 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체크인 카운터엔 한 명뿐이다! 오마이갓이다 진짜. 큐알과 별개로 종이에 수기로도 양식을 적으라고 했는데 막상 체크인 때 종이는 받지도 않았다.


이곳에 머무는 순례자가 많다 보니 미리 신청한 저녁을 근처 레스토랑으로 나눠서 배정해 주었다. 체크인 줄을 기다리다 만난 다인과 내리막에서 빠른 길로 갔던 민철님이 같은 레스토랑에 배정받아서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잠시 후 프랑스 할아버지가 우리 테이블에 합석했다. 어색해하시길래 챗지피티로 열심히 번역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할아버지는 손녀와 프랑스에서부터 걸었는데 손녀는 일 때문에 중간에 돌아가고 나머지 길은 혼자 걸으신다고 하셨다. 우리도 모두 오늘 처음 본 사이라고 하니 흥미로워하신다. 한국 사람들이 여기에 왜 이렇게 많이 오냐 물어보셔서 미디어에 많이 나와서 그렇다고 말씀드리니 역시 흥미로워하셨다.


저녁 메뉴는 닭구이와 감자튀김이었는데 달콤한 소스가 발린 닭구이가 정말 맛있었지만 아침에 싸 온 샌드위치를 늦게 먹어서 그런지 다 먹지 못했다. 가톨릭 신자인 다인은 미사에 참석한다고 먼저 일어났고, 민철님은 혼자서 와인 한 병을 거의 다 비우고 취해버렸다. 프랑스 할아버지와도 부엔 까미노를 나누며 헤어졌다.


2년 전 산티아고에 갔을 때 한 여름이지만 일교차가 심해서 고생했던 기억 때문에 경량 패딩을 챙겨 왔는데, 갈리시아쯤 가서 입을 거라 생각했던 그것을 이틀차에 꺼내 입었다. 산 중턱인 비 오는 론세스바예스의 저녁은 심하게 추웠다. 침낭이 아닌 라이너만 챙겨 왔기에 패딩을 입고 라이너에 들어가 보았지만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동키를 계속 쓸 거라면 그냥 침낭을 가져와도 됐을 텐데.


어젯밤과 오늘 밤이 참 다르다.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은 아니지만 이 길 위에서 인연을 맺고 헤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천천히 걸으려고 하니 아마도 만나고 헤어짐이 더 잦겠지.



오늘의 침대 <Albergue de Peregrinos de Roncesva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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