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생장→보르다(오리손)
2025.7.1 (Tue) / 35°
7:10~11:40 / 4h 30M / 8.55km
순례길 첫날.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산을 넘어갈 것인지, 돌아갈 것인지. 대게는 산을 넘어간다. 피레네산맥 일부로 나폴레옹이 포르투갈 정복을 위해 이용한 길이어서 나폴레옹 루트로 부른다고 했다. 가장 높은 고도가 1500m 정도인 프랑스 길 전체 중 가장 힘든 구간이라고 한다.
보통 하루에 이 산을 넘어가지만, 중간에 머물러 갈 수 있는 알베르게가 딱 두 개 있다. 첫날이기도 하고 당연히 힘들 것을 예상했기에 이틀에 나눠서 걷기 위해 중간에 있는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해 두었다. 현재 내 배낭의 무게는 7kg 정도이다. 포르투갈 길은 대부분 평지라 전체 일정을 5kg의 배낭을 메고 걸었지만 이번엔 초반은 동키를 이용하려고 한다. 배낭여행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세르파 없이 안나푸르나(푼힐)를 갔을 때 하산길에 무리해서 디스크가 터져버렸다. 이후 일정은 여행이 아닌 요양이 되어버렸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병원을 다니며 고생했기에 높은 산이라면 몸을 충분히 사릴만하다 판단했다.
어제 숙소 주인이 내일 일정을 대강 브리핑해 주었는데 나 빼고 모든 사람들이 일찍부터 준비했기 때문에 알려준 시간보다 일찍 모임이 시작되었다. 서둘러 합류해서 함께 기도하고 서로의 안녕을 빌어준다. 론세스바예스가 목적지인 사람들은 바로 숙소를 떠나고 나는 일부러 늦장을 부려 7시쯤 꼴찌로 숙소를 나왔다. 전날 더위로 걱정했던 것과 달리 새벽녘부터 보슬비가 내려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날이 흐려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얇은 바람막이를 챙겨 입고 나섰다. 스틱을 펼쳐 바닥을 짚어본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운동을 전혀 안 하다 와서 그런지 길은 생각보다 순조로웠지만 나는 너무 힘들었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갔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을 땐 10미터에 한 번씩 쉬어가며 간신히 걸었다. 10시가 넘어가니 날이 개며 해가 쨍하게 비춘다. 얼굴에 빨갛게 열이 오르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숨이 찬 건지 가슴이 저린 건지 어제의 저혈당 증상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불안해졌다. 겁이 나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체력으로 온 것이 어이없기도 했다. '첫날부터 쓰러지면 너무 쪽팔린데.' 앞으로 나가고 싶지만 몸이 맘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목적지인 보르다 숙소 전에 있는 오리손 산장에 간신히 도착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죽을 것 같은 기분이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다짐했다. 테라스에 어제 만난 뉴질랜드 커플이 앉아 있었다.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자신들의 테이블로 오라며 부른다. 이들은 영국에서 일을 마치고 세계여행 중이라고 했다. 오늘은 오리손에 머물 거라고 했다. 부럽다. 나도 오리손으로 예약할걸.. 한참을 쉬면서 콜라와 오렌지 주스까지 마시고 보르다로 출발한다.
여유 있게 출발했고 느리게 걸어왔지만 거리가 짧아서 체크인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과 마당에 앉아 체크인을 기다렸다. 오늘 숙소는 비교적 최근에 오픈했고 평이 아주 좋았다. 오리손이 아닌 이곳으로 예약 한 이유다. 14명이 정원으로, 저녁엔 야외 테이블에 다 함께 모여 커뮤니티 디너를 즐긴다. 포르투갈 길은 이런 문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했다. 예약할 당시에는..
체크인 시간이 되자 숙소 주인은 우리를 모아놓고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나는 그저 빨리 씻고 드러눕고 싶을 뿐인데 새겨들어야 하는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켜볼수록 컴플레인을 하기에 애매한 사장의 인종차별을 느껴서 가뜩이나 떨어진 사기가 더 다운되었다. 당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묘한 레이시즘이었다. 나눠줄 웰컴 드링크를 고르라고 하고는 내 것은 까먹은 것처럼 빼먹고, 예약을 체크하기 위해 이름을 한 명씩 부르는데 내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거나, 방 배정 때 여자들을 먼저 호명하다가 나만 마지막에 남자들과 그룹을 지어준다거나, 식사시간에 각자 소개를 하는데 내가 말하는 도중 요리를 체크하러 자리를 떠서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써 놓고 보니 너무 티가 나는데 분위기가 화기애애 시끌벅적해서 남들에게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깔끔한 숙소와 맛있는 저녁을 원한다면 추천하고 싶다. 강박에 가까운 깔끔과 훌륭한 요리실력만 본다면 만족할 수 있는 숙소였다.
저녁을 먹고 안팎으로 상태가 좋지 않아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누워서 가계부를 정리하고 일기를 쓰는데 밖에서 사람들의 대화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모두 오늘 저녁이 너무 즐거운가 보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괜히 서글프다. 단지 지나가는 감정이고 작은 에피소드일 뿐이야. 힘들고 지친 나를 위로해 주는 건 나 자신뿐이다. 겨우 8km 걸어 놓고 이렇게 센티해 지다니.
첫날 걸어보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는데, 이후 관광 일정을 포기하고 걷는 날짜를 늘려서 하루에 소화할 거리를 줄이자. 동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자, 땡볕에 걷게 되면 체력을 봐서 힘들면 중단하자. 등등 절대로 무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기온이 훨씬 낮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숙소도 예약되어 있으니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