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작하는 순례자를 위하여

D-1 마드리드→생장

by 게으른여름

2025.6.30 (Mon) / 37°


새벽 6시경 호스텔을 나오니 밖이 깜깜하다. 거의 이틀밤을 샌 셈인데도 결국 시차 때문에 잠을 설쳤다. 아토차역 근처로 숙소를 잡은 덕에 늦지 않게 첫 기차를 타러 갈 수 있었다. 역에 문을 연 카페가 몇 있어서 커피와 오렌지 주스, 토스타다가 세트로 나오는 메뉴를 주문했다. 어제 피곤해서 소식을 전하지 못한 언니와 통화를 하며 아침을 먹는다. 언니 집에 맡기고 온 밍키가 잘 있는지 걱정이다. 며칠 전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져서 병원에서 검사를 두 번이나 받았는데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부디 별 탈 없이 회복해야 할 텐데.


스페인에서 기차는 처음 타본다. 짐 검사하는 곳을 지나 플랫폼으로 들어왔을 때 물을 사 올걸 싶었다. 안쪽에도 카페가 한 곳이 있었지만 줄이 너무 길었다. 별 수 없이 나도 줄을 서긴 했지만 직원이 한두 명이 아닌데 일 처리가 너무 답답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느려터진 일머리인데 다들 느긋하다. 누군가가 불평을 할 만도 한데 다들 평온한 얼굴이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출발을 몇 분 남기고 물 한 병 구입 성공.


이번 여정은 그래도 (내 기준) 전보다 여유 있게 한 달 정도 준비했지만 갑자기 와 있는 스페인이 조금은 얼떨떨하다. 잠이 부족하지만 긴장인지 설렘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남은 동전을 처리하느라 인천 공항에서 사 온 마이쮸를 까먹으며 바깥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팜플로나(Pamplona)에 도착했다. 팜플로나 역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잠깐 사이 느끼는 후끈한 공기와 태양이 불가마에 들어온 것 같다. 버스 터미널까지는 10여 분 정도로 가까웠다. 덥지 않고 가방이 무겁지 않다면 걸어가도 될 거리인 듯하다.


터미널에서 생장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국 분이 있어서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나를 아토차역 카페에서부터 보았다고 한다. 더 얘기를 나눠 보니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고 둘 다 두 번째 까미노였다. 그리고 오늘 생장에서 같은 숙소를 예약했다. 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가 있나. 반가운 마음. 이제야 내가 순례길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난다.


도착까지 잠을 좀 청해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저리고 현기증이 났다. 식은땀이 이마와 등을 적시더니 손발까지 저리다. 예사롭지 않아서 증상을 검색해 보니 저혈당과 비슷했다. 급하게 포도당 캔디를 찾아 몇 개를 까먹었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정신까지 혼미해져서 내일 출발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죽고 싶을 땐 살더니 살려고 온 스페인에서 죽는 건가..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도 없어서 가만히 눈을 감고 심호흡만 할 뿐이었다. 고비를 넘긴 건지 익숙해진 건지 싶을 때쯤 차에서 내렸다. 일어서면 쓰러질 줄 알았는데 다행히 걷다 보니 컨디션이 돌아왔다.


출발지인 생장은 기대만큼 예쁜 동네였다. 이것이 프랑스 시골 감성인가 싶은 아기자기한 곳이다. 순례자 사무실에 들러 크레덴셜(순례자여권)을 발급받아 첫 도장을 찍었다. 오늘부터 투입된 한국인 봉사자가 있어서 반가워하며 한국말로 설명을 들었다. 얼마 전 순례를 마쳤다는 까만 봉사자를 보니 예전 배낭여행이 끝났을 때 새까매졌던 내가 생각났다. 이번 순례길이 끝나면 나도 까매져있을까.


오늘의 숙소는 생장에서 나름 유명한 '51번 알베르게'로 불리는 곳이다. 출발 전 다 함께 모여 기도와 축복을 비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좋은 기운을 가지고 출발하고 싶어서 꼭 묵고 싶던 곳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내일 도착지에 따라 방 배정을 받았다. 피레네를 하루에 넘지 않고 중간 지점인 오리손(보르다)까지 가는 나와 가브리엘은 싱글 침대가 있는 3층 다락방을, 나머지 분들은 2층 침대가 있는 2층 방을 배정받았다. 오늘 베드가 없다고 문 앞에 써 붙여 놓은 것과 달리 3층엔 나와 가브리엘 둘뿐이다.


버스에서 만난 민경과 점심을 함께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보았지만 시에스타 때문에 거의 문을 닫았다. 문을 연 곳이 한 곳 있었는데 메뉴가 샐러드와 샌드위치였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어서 배를 채울만한 음식을 원했지만 할 수 없지. 가게 밖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보니 옆자리에 가브리엘이 앉아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산티아고까지 며칠간 걸을 예정인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뒤 테이블 커플이 자신들도 순례길을 걷는다며 말을 걸었다. 밝고 인상이 좋은 이 커플은 뉴질랜드에서 왔다고 했다. 대충 비슷한 일정이라 또 보자고 인사를 나눴다.


식사 후 동네를 구경하다 성당에 들러 무사 완주를 기원하며 초를 올렸다. 지난 순례길 이후 가톨릭의 매력에 푹 빠져 불교신자지만 될 수 있으면 성당에 많이 들리고 미사도 참석하려는 편이다. 성당의 건축부터 미사의 세리머니까지 모든 것이 매력적이다. 외적이 것에 끌려 진지하게 개종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나에겐 불교 교리가 잘 맞는 것 같다.


생장은 오늘 미친 듯이 더웠다. 이곳에 모인 순례자들의 최대 이슈는 더위이다. 10분 거리의 까르푸를 가는데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타들어간다는 표현이 딱 맞는다. 알베르게 주인은 앞으로 계속 더울 거라며 북쪽 길을 걷는 것을 추천해 주었다. 북쪽 길은 매일 등산을 하는 루트라 아무리 시원하다고 해도 내겐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내일은 첫날이기도 하고 피레네를 넘어야 하니 동키를 신청했다. 사실 신청해야지 하고 더위에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민경이 동키 사무실에 간다기에 따라가서 함께 신청할 수 있었다. 민경은 론세스바예스로 바로 가기 때문에 오늘이 함께하는 마지막이다. 내가 좀 더 어렸다면 함께 가고 싶어서 애썼겠지만 여행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순리임을 알기에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첫날. 무사히 잘 해낼 수 있을까.

내일의 나 파이팅.



21C99CCF-7B6F-4AC8-B092-BA5F7D0F3959_1_105_c.jpeg
303632D8-9C66-4705-B5A8-282D60AECEFC_1_105_c.jpeg
E571D158-BB1D-4249-A418-1C4F15467504_1_105_c.jpeg
마드리드를 떠나며
2D09B70D-191D-41F8-927D-E9C4A88F856E_1_105_c.jpeg
56876F84-CB8B-4F54-89FF-7258C0027CB0_1_105_c.jpeg
B9C6D8E8-0E6D-481F-8086-8D0E208B0240_1_105_c.jpeg
80733779-D119-4AD4-A93D-7F6A70AFA50A_1_105_c.jpeg
프랑스길의 시작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
00BAA64F-123D-49DA-880E-8D7D798933B0_1_105_c.jpeg 오늘의 침대 <Gite de La Porte Saint Jacques: a Hostel for Pilgrim>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