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3 론세스바예스→수비리
2025.7.3 (Thu) / 23°
6:20~14:10 / 7h 50m / 22km
여전히 중간에 잠이 깬다. 다시 잠들었다 사람들이 준비하는 소리에 깨어 어둠 속에 짐을 챙겨 나왔다. 동키를 맡길 곳을 찾다가 옆의 한국인 모녀가 가방을 맡긴듯해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어제 가방을 찾아왔던 곳과 같은 곳이었다. 밖은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지만 우비가 없기도 하고 약한 비라 바람막이와 모자만 쓰고 출발한다.
첫날은 9km, 둘째 날은 18km, 그리고 오늘은 22km를 걸어야 한다. 오늘은 마을로 내려간다. 산을 가로지르는 숲을 통해 가는 길이다. 숲길과 마을을 지나 지형이 특이한 돌 경사로를 지나면 목적지인 수비리(Zubiri)가 나온다.
얼마쯤 걷고 아침을 먹으려고 했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서 처음 만난 바에 들리기로 했다. 이번 순례길의 첫 바 이다. '우노 아메리카노, 앤 디스. 뽀르 파보르' 스페인어와 영어, 손짓을 섞어서 커피와 빵을 주문했다. 자리에 앉아 먹고 있는데 아침에 마주친 모녀가 들어왔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혼자 왔냐고 이것저것을 물어보셨다. 어머니는 이미 몇 해 전 패키지로 프랑스 길을 완주하신 경험이 있고 이번엔 대학생 딸과 함께 오셨다고 했다. 딸의 체력을 걱정하면서도 든든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 큰 딸과 엄마가 함께 걷는 것이 좋아 보이고 부럽기도 했다. 내가 엄마에게 같이 가자고 하면 함께 왔을까? 엄마는 외향적이고 지방의 절에도 열심히 찾아다녔지만 무릎이 약하고 체력이 달려서 순례길은 오지 못했을 것 같다. 내 선입견인가. 나도 무릎이 약하고 체력이 바닥인데 두 번째 순례길에 왔으니. 이제 엄마가 없으니 물어볼 수가 없네. 산울림 회상의 가사가 꼭 내 맘 같다. 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지네.
비가 온 뒤라 길에 달팽이가 무척 많았다. 크기가 무척 커서 밟지 않도록 조심히 다녀야 한다. 중간에 만난 숲 입구가 비밀의 터널 같은 모양이라 신비로운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비즈카레타(Bizkarreta-Gerendiain)마을을 지나는데 '길 위의 책방?'을 만났다. 한 할아버지가 그 앞을 열심히 쓸고 계셨는데 이제 막 문을 연 듯(막 책들을 꺼내서 진열해 놓으신 듯) 했다. 길가에는 책과 신발이 죽 늘어져 있었고, 계단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니 넓은 마당에 고철로 만든 장식과 큰 천막 여러 동이 듬성듬성 놓여있었다. 책이 가득한 천막, 그림과 가구를 진열해 놓은 천막, 의미를 알 수 없는 마네킹과 동키 조형물이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예술적이고 어떻게 보면 황학동 벼룩시장 느낌이다. 길을 쓸던 할아버지가 들어오시길래 이곳이 무슨 곳인지 여쭤보니 책을 좋아하는 15명이 함께 만든 공간이라고 하셨다. 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이미 느리게 걷고 있어서 가볍게 훑어만 보고 나왔다.
다음 마을로 향하는 도중 한국인 모자를 마주쳤다. 아마도 전날 들었던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초등학생과 엄마 같았다. 물어보니 맞다고 한다. 안나푸르나(ABC)를 다녀왔다고. 반가워서 나도 푼힐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 같은 애송이가 비빌 수 없는 프로 산악인이었다. 엄마와 아들 모두 한국의 100대 명산을 완등했단다. 프로여서 그런지 둘은 정말 잘 걸었다.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다시는 만날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수비리 하산길은 지리시간이 생각나는 괴상한 지형의 돌길이었다. 이 길이 너무 힘들다고 들어서 겁을 먹은 것 치고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발목이 삐끗하지 않게만 조심한다면 무난한 내리막이었다. 길의 모양과 별개로 20km 넘게 걷고 있는 것이 나를 힘들고 지치게 했다. 그래도 별일 없이 목적지인 수비리에 도착.
미리 예약해 두었던 숙소에 체크인을 하니 아까 만난 모자가 도착해 있었다. 자신들의 방에 침대가 하나 빈다고 같이 쓰면 좋겠다고 해서 주인에게 물어보니 같은 방을 배정해 주었다. 4명이 쓰는 방이었는데 다른 한 명은 론세스에서 만났던 다인이었다. 길 위에서 만난 한국인 넷이 룸메이트가 되었다.
구글맵을 검색해 보다 가보고 싶은 식당이 있어서 시에스타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방문했다. 폭립의 후기가 굉장히 좋았는데 먹음직스러운 리뷰 사진들과 달리 내 고기는 소스가 많이 옅었다. 그래도 양은 똑같고 맛도 그럭저럭 하니 배도 고프고 해서 사이드까지 꾸역꾸역 다 먹었다.
수비리는 아르가 강 옆에 위치한 작고 아기자기하고 크게 볼 것 없는 도시였다.(내가 못 봤을 수도..) 씻고 빨래하고 저녁 먹고 슈퍼에 들러 내일 아침으로 먹을 바나나와 물을 사고 보니 하루가 끝이다. 강에서 수영을 하기도 하고 강가에 누워서 일광욕도 한다는데 난 여기까지 겨우 걸어서 왔기 때문에 다른 여유를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숙소에 돌아와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인과 아이 엄마 혜진은 나이차가 있긴 하지만 대학 동문이었다. 새삼 좁은 세상이다 싶다.
이번엔 운동화를 신지 않고 샌들을 신고 걷는다. 테바를 신었을 땐 바닥에 쿠션이 없어도 편했는데 호카 샌들은 바닥이 영 적응이 안 된다. 무릎은 보호대를 하고 발목은 스포츠 테이프를 붙이는데 지난번에 이 컨디션으로 걸었을 때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발목도 보호대를 할까 하다가 돈은 좀 더 나가겠지만 테이프를 계속 붙이기로 했다. 오늘 날이 더워서인지 테이프 붙인 자리에 접촉성 피부염이 생겼다. 첫날 정신이 혼미하여 선크림을 미처 바르지 못하고 나시를 입고 산을 오른 탓에 어깨가 심하게 탔었는데, 그곳이 서서히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몸이 여기저기 난리다.
자려고 누웠는데 어깨가 가렵고 화끈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화상인가 보다. 불도 모두 끄고 다들 자고 있었지만 참을 수가 없어서 항히스타민제라도 먹어보기로 했다.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2층 침대에서 내려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가방을 뒤져 약을 찾아 먹었다. 다행히 한 시간쯤 후에 가려움이 사그라들어 잠을 잘 수 있게 됐다.
내일도 동키를 이용하려고 한다. 그나저나 시차는 언제 적응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