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6 푸엔테 라 레이나→에스떼야
2025.7.6 (Sun) / 27°
6:00~14:00 / 8h / 22.8km
한 방에 머물렀어도 떠나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내일은 나도 새벽 일찍 떠나겠다고 다짐하고 잠들었지만 겨우 6시에 출발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나보다 늦게 출발한 재형과 민철에게 따라 잡혔다. 며칠째 계속 따라 잡히는 중이다. 덕분에 시라우끼(Cirauqui) 마을의 해바라기 밭에서 인증 사진을 건졌다. 부모님 프사 같긴 해도 이게 다 추억이지. 순례길은 계절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는데 7월의 프랑스길에선 만개한 해바라기 밭을 만날 수 있었다. 미처 몰랐던 정보라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이 기운을 받아 부디 내 앞길도 해바라기처럼 활짝 피었으면.
다음 마을인 로르카(Lorca)에는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알베르게 겸 바가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판매하고 있어서 한국인들이 많이 들른다는데 나는 아아파가 아니긴 하지만 동포애와 호기심으로 방문해 보기로 했다. 마을 초입부터 스페인어,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메뉴를 싸인보드에 적어둔 것을 보고 한국인이 일을 정말 잘한다고 느꼈다. 호기심에 방문했지만 안 갔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사장님이 너무 좋으신 분이었다. 한국 사람들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시고 얼음도 듬뿍 담아 주셨다. 직접 만드셨다는 또르띠아도 다른 곳보다 포실포실하고 진한 맛이 났다.
10km가 넘어서니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이곳에서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좀 더 쉬어가기로 했다. 사장님께서 혼자 있는 나를 보고 일행은 먼저 갔냐고 물으시며 편하게 더 쉬고 가라고 하셨다. 말뿐 아니라 빵도 한 뭉탱이 더 나눠 주셨다. 타지에서 매일 만나는 불특정 다수의 모국인이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닐 텐데 그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친절하고 기꺼이 하나라도 더 주려는 마음을 내는 걸 보니 보통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멋진 한국의 여성은 도시도 아닌 스페인 시골 마을에 어떻게 시집을 오게 되었을까. 나라면 가능할까. 바게트를 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혜진 모자 일행이 가게로 들어왔다. 혜진은 오늘 이곳에서 숙박하며 팜플로나 축제를 구경하러 가고 오늘 덜 걸은 만큼 내일은 더 길게 걸을 예정이라고 한다. 팜플로나 나도 가고 싶긴 한데.. 고민이 되긴 했지만 지치기도 했고 배낭을 미리 보내놓아서 그냥 출발하기로. 안녕 우리는 내일 만나요.
맥주 이름 같은 에스테야(Estella)는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강이 흐르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마을이었다. 오늘도 선착순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한다. 침대를 배정받고 보니 럭키하게도 내 섹션만 2층 침대가 아닌 싱글 침대 2개가 놓여있었다. 아마 노인이나 몸이 안 좋은 분을 위해 남겨 놓는 자리 같은데 내가 늦게 도착해서 배정받게 된 것 같았다. 후에 도착해서 옆자리를 쓰게 된 미국 여자애와도 '우리 침대만 싱글이야. 너무 좋다'며 함께 즐거워했다. 일상에서는 여덟 가지를 가지고 있어도 두 가지가 없다며 괴로워하곤 했는데 길을 걸으며 만나는 이런 작은 행운들이 큰 행복으로 느껴진다.
숙소에 먼저 도착해 있던 다인과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동안 도착해서 씻고 빨래를 하고 나면 시간이 늦어서 점심을 먹지 못하고 애매하게 점저를 먹게 됐는데 오늘은 점심을 먹고 싶어서 순서를 바꿔보기로 했다.(빨래를 빨리 널어야 하기에 좋은 방법은 아니다.) 오늘의 점심은 중국집. 볶음면과 볶음밥, 꿔바로우를 시켰는데 야외테라스에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하는 분위기는 좋았지만 맛집은 아닌 듯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입구에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부터 본 강아지가 있었다. 이 귀여운 아이도 목에 가리비를 걸고 있다. 아빠와 아들, 강아지가 일행인데 강아지라고 하지만 덩치가 큰 허스키+셰퍼드 믹스인 듯했다. 강아지가 무척 활발해서 몇 살이냐고 물어보니 7개월이란다. 그럼 그렇지. 한참을 걸어왔을 텐데 기운이 남아서 계속 놀아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모든 알베르게가 동물을 받아주지는 않아서 아들만 공립알베르게에서 자고 아빠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른 곳에서 잔다고 했다. 개를 데리고 여행만 가도 사료에 간식에 밥그릇, 물그릇 방석까지 챙길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순례길이라니.. 아무리 개를 사랑하지만 나는 못할 것 같다.
체크인 때 커뮤니티 디너를 예약받았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 배가 불러서 저녁 예약을 취소했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고 마트에 들렀는데 걷는 근육을 기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프로틴이 들어있는 요거트를 사보았다. 스페인은 요거트 종류가 너무 많아서 마트에 갈 때마다 혼란스럽다. 마트 물가가 저렴하니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먹으면 경제적이겠지만, 요리도 귀찮고 힘든 하루에 대한 보상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서 아직까지는 계속 외식을 하고 있다.
이제 슬슬 순례자들이 눈에 익는다. 내가 한국 사람들과 친해진 것처럼 외국인들도 그들끼리 친해져서 점점 무리가 형성되어 간다. 보르다는 나에게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고 컨디션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아서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이후에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것으로 그만 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을 숙소에서 만나서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름을 말해주니 자기 와이프의 중국친구의 이름도 00라며, 나와 비슷한 이름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전혀 다르다고 말해주려다가 그냥 끄덕였다. '마크'고 '마이클'이고 우리도 다 비슷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니까. 이름을 아는 사람이든 얼굴만 마주친 사람이든 어찌 되었건 이 낯선 길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생기는 건 반가운 일인 것 같다.
오늘까지 여전히 동키를 이용하고 있고, 신발도 여전히 적응을 못하고, 발은 아픈 걸 넘어 엄지발가락이 점점 감각이 무뎌져가는 느낌이다. 고로 내일도 동키를 이용할 예정이다. 10시만 돼도 날이 금세 뜨거워져서 더 일찍 출발하면 좋겠지만 쉽지가 않다. 다른 사람들은 5시에 출발한다는데 나는 속도도 느린데 그게 참 어렵네.
내일은 5시 출발을 꿈꾸며, 오늘도 수고했다.
*빨리 글을 올리고픈 마음에 제목을 급하게 지었는데, 브런치 감성이 아닌듯해 제목을 바꿔보았습니다.
*브런치 북이 30편만 가능하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어, 아래 구성으로 나눠서 올릴 예정이에요.
1편: 출발~레온 / 2편: 레온~산티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