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1 레온
2025.7.21 (Mon)
순례가 시작된 지 21일 차, 처음으로 걱정 없이 늦잠을 잤다.
원래 일주일에 적어도 하루는 원 없이 자야 충전이 되는 사람인데 긴 시간 동안 문제없이 잘 버틴 게 대단했다. 낯섦이 주는 긴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불러온 과도한 아드레날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모든게 사라진 오늘은 알람도 못 듣고 10시까지 푹 자고 일어났다.
츄러스 맛집 찾아가기로 하루를 시작. 숙소에서 나와 레온의 골목들을 구경하며 걸어본다. 같은 걸음인데 스틱을 들고 무릎 보호대를 차면 비장해지고 쪼리를 신고 나오면 그냥.. 생각이 없다. 어제 큰 도로로 들어올 땐 화려한 건물과 의류 매장들이 눈에 띄었다. 오늘은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건물과 가게들이 눈에 띈다. 100년도 더 된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패스트패션을 선도하기도 하는 역설적인 매력의 스페인이다.
츄러스 가게도 부모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곳이다. 현지 할아버지들도 줄을 서 계셔서 현지인 맛집임을 알 수 있었다. 1개에 0.28유로, 계산하기 편하게 100개까지 가격을 붙여놓았다. 한국에서도 이런 걸 붙여놓는 집을 봤던 거 같은데. 오로지 츄러스만 판매하고 포장만 하는 집이라 음료와 함께 먹고 싶으면 근처 카페에 가지고 가면 된다. 카페 안에서 츄러스를 먹는 사람들도 있긴 했는데 왠지 눈치가 보여서 커피를 시켜서 테라스로 가지고 나왔다.
현지인이나 순례자들이나 보통 카페 콘 레체(라떼)를 마신다. 나는 소화가 잘 안 돼서 먹던 대로 아메리카노만 마셨는데 오늘은 쉬는 날이고 배탈이 나도 괜찮으니까 처음으로 카페 콘 레체를 시켜봤다. 커피 맛을 잘 모르긴 하지만 여기 라떼가 텁텁함이 덜하고 덜 느끼한 듯하다. 우유가 좋은 건가 커피가 좋은 건가. 츄러스를 욕심내서 5개나 샀는데 3개째부터는 억지로 먹었다. 꽈배기 먹고 싶다. 여기가 왜 맛집인지 모르겠어요..
카페에서 나와 돌아 가는 길에 나처럼 늦잠을 자고 츄러스를 사러 나온 도영을 만났다. 도영이 마트에서 파는 오렌지 쥬스가 진짜 맛있다고 하길래 궁금해서 마트를 쫓아갔다. 돈시몬 착즙 오렌지쥬스였는데 그동안 먹은 돈시몬이랑 차원이 달랐다. 바로 짜준 착즙보다 싸고, 더 맛있고, 양도 많았다. 이 맛있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납복 한 묶음과 1리터짜리 오렌지 쥬스를 손에 들고 숙소를 가려고 했으나 옷 가게가 너무 많아서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옷을 두벌만 입고 다니다 보니 예쁜 옷들에 눈이 절로 돌아간다.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살 옷을 미리 봐두는거야. 견물생심이라고 뭐라도 사고 싶은데 가방 무게는 늘릴 수가 없어서 스포츠 테이프를 자르는데 쓴다는 명목으로 작고 예쁜 컬러의 네일가위를 샀다.
도시 구경을 하는 동안 준호와 태훈이 40km가까이 걸어 레온에 도착했다며 연락을 했다. 최후의 만찬(?) 이후로 넷이 뿔뿔이 흝어져 걷게 되었는데 준호와 태훈도 이틀 코스를 당겨서 하루만에 걸어 왔다고 했다. 성당 앞 포토존에서 서로서로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기념품 가게에서 배낭에 걸 가리비도 다시 구입했다. 둘 다 길게 걸어오느라 점심을 먹지 못했고 나도 식사 전이라 애매한 시간이지만 밥을 먹기로 했다. 평이 그럭저럭 하던 뷔페를 가보고 싶다고 하니 나머지 둘도 좋다고 했다. 중국인이 사장님이 운영하는(것으로 추정되는) 중식과 초밥이 섞인 아시아풍 뷔페라고나 할까. 뷔페 가격이 빨간색 검은색으로 표기 되어있는데 모든 메뉴를 다 먹을 수 있는 빨간색은 23.95유로, 일부 메뉴인 검은색은 17.95유로였다. 메뉴판을 둘러보니 검정으로도 충분해서 검정을 선택. 여기에 조건이 하나 더 있었는데 음식을 남기면 2유를 내야 했다. 접시에 음식을 담아 오는 게 아니라 김밥천국 주문처럼 종이에 적인 메뉴에 개수를 표기해서 건네주면 요리를 서빙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초밥과 요리 등등 다양하게 골라서 주문했는데 한참을 먹어도 초밥이 나오지 않았다. 초밥을 제일 먹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빼먹은듯해서 다시 주문지에 초밥을 체크해서 건네주었다. 그러면서도 설마 중복은 아니겠지 했는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초밥들이 두 배가 되어서 돌아왔다. 셋 다 기가 막혀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2유로는 내기 싫고, 다 먹기는 힘들고. 우리가 생각한 묘수는 회만 빼먹고 라면 국물에 밥 말기였다. 지저분하게 다 먹긴 했지만 비싼 돈 내고 음식으로 괴로운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 나중에 계산할 때 보니 그냥 경고성 문구이고 체크는 안 하는듯했다. 아니면 우리의 노력을 알아준 걸까.
잊지 못할 식사 후에는 혼자 레온 대성당을 보러 갔다. 관광지답게 순례자 할인은 없었다. 레온 대성당은 스테인글라스가 특히 유명하다고 한다. 음성해설을 들으려면 내가 보는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안내판을 찾지 못해 포기해버렸다. 뭔지는 잘 몰라도 크고 정교하고 화려하니까 그저 '우와' 감탄 할 뿐이다. 사실 성당 내부보다 성당 뒤편의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통로일 뿐인데 기둥과 천장까지 정교한 조각이 이어져 있는 디테일이 놀라웠다. 성당 감상을 마친 후에는 마침 시간이 맞아서 출구와 이어진 예배당에 들어가 저녁 미사에 참석했다.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공연 보듯이 미사를 구경하는 게 좋아서 자꾸만 가게 된다. 미사를 마치고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는데 준호와 태훈에게 아직도 관람 중이냐며 문자가 왔다. 기다려 주는 줄도 모르고 미사까지 참석해 버렸네. 셋이 거리의 벤치에 앉아 마트에서 플렉스 한 프리미엄 감자칩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노을이 질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내일부터는 서로 일정이 다르다. 헤어질때는 언제든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만남은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것을. 그래도 우리는 목적지가 같으니 다시 만날 때까지 무이비엔 하기를!
긴 메세타 구간이 끝났다. 메세타를 걷는 시기엔 주변 순례자들이 완전히 바뀌었었는데 레온에 오니 낯익은 얼굴들이 길거리에 가득하다. 다시 혼자 길을 걷는다. 산티아고까지 앞으로 2주 정도 남았는데 어떤 길을 걷게 될까. 또 누군가를 만나게 될까. 발바닥은 이렇게 계속 아픈 걸까. 살은 좀 빠졌을까. 갈리시아 음식 빨리 먹고 싶다. 기대와 걱정과 설렘이 뒤섞여 복잡한 밤이다. 지금까지 매일 즐겁고 무사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내일의 나도 화이팅.
저의 여행기를 읽어주시고, 읽지 않았더라도 라이킷을 눌러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레온->산티아고(+a) 여행기는 2편으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2편에서는 더 느리고 느슨해진 순례자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