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지 않기로 한 선택에 대하여
대표가 제안한 세가지 선택지를 듣고 자리에 돌아온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 겪어보는 대우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이전에 함께 일하던 마케팅 실장님도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나가게 되는 장면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아... 결국 이런 일이 나에게도 오는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대표 말을 곱씹다 보니, 감정 뒤로 이성적인 생각도 따라붙었다.
지금 상황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내가 회사 입장에서 ROI가 나오지 않는 직원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이 월급으로 ROI를 따지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제 정말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취업의 문턱이 높아진 요즘을 떠올리면, 대표가 제안한 두 번째 선택지. 회사를 다니며 전략과 방향성을 다시 증명해보라는 제안이 더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권유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선택지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곳에서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된 게 아닐까. 회사를 위해 늦게까지 일하던 모습도 효율적인 방식은 아니었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지 못한... 소위 SNS에서 말하는 '일 못하는 직원'에 가까웠던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이어지자 그동안 스스로를 얼마나 혹사시키며 버텨왔는지도 함께 떠올랐다. 그러다 매일 늦은 시간까지 집에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의 한마디가 문득 생각났다.
"그만 거기서 나와. 당분간 그냥 푹 쉬었으면 좋겠어."
25년 12월15일 월요일
나는 출근하자마자 대표에게 1on1 요청 메시지를 보냈다. 전주에 나눴던 면담에 대한 답변을 드리고 싶다고.
회의 일정이 잡히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대표가 내 눈앞에 앉아 있었다. 지난 연봉 협상 자리보다 분위기는 훨씬 가벼워 보였지만, 내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난 연봉 협상 자리에서 나눴던 이야기에 대해 주말 동안 깊게 고민해봤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셨다는 점도 알고 있고, 대표님이 기대하셨던 만큼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점도 저 스스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두 번째 선택지였던 새로운 전략을 제시하는 건, 지금처럼 리소스가 제한된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현재 맡고 있는 영역에서도 이제 막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단계라 당분간은 SEO 콘텐츠에 집중하는 게 회사 입장에서도 더 맞다고 생각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붙잡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몸과 마음이 생각보다 많이 지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당분간은 쉬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결론은... 세 번째 선택지인 퇴사 절차로 진행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다만 회사에 제 역할이 다시 필요해지는 시점은 반드시 올 거라 생각합니다. 그때는 계약직이든 프리랜서든 한 번 인바이트 주시면 좋겠습니다. '타이밍'이 맞는다면 저도 기쁜 마음으로 응하겠습니다."
대표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저희도 규동님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은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가 되면 제가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근무일은 19일 금요일까지로 하고, 인수인계까지만 잘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회의실을 빠져나온 나는 굉장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30대 중반의 애매한 나이, 나는 다시 또 취준의 길을 걷는 쪽으로 선택했다. 이미 이전에 쌩퇴사를 두 번이나 겪어봤기 때문에 이 선택이 얼마나 괴로울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직장생활은 결국 버티는 사람이 승자라는 말도 잘 안다. 분명 막막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 홀가분했다. 도망쳤다는 느낌보다는, 오래 미뤄두었던 결정을 이제야 꺼낸 기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카카오톡을 열고,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방금 이야기 잘 나누고 나왔어. 19일까지 일하라고 하시네. 그동안 옆에서 힘들어 하는 모습도 지켜보고, 이야기 들어주느라 고생 많았어, 당분간 혼자 벌어야 할텐데 조금만 기다려줘. 미안하고 고마워요.."
잠시 뒤, 아내에게서 답장이 왔다.
"1년 동안 일하느라 정말 너무 고생 많았어. 천천히 쉬면서 다시 준비해봐요. 내가 일하고 있으니까 너무 부담갖지 말고, 앞으로 더더 잘될거야."
그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이 상황을 버텨내고 있던 힘의 정체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혼자서 잘 판단해서가 아니라,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거라는 생각.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곁에서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지지해준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내가 쉼 없이 달려오던 2025년이, 조용히 그리고 조금은 담담하게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