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과 지도, 나침반이 그려낸 자본주의의 세계』 프로젝트 서문
윤리의 역사는 아무도 그에 맞춰 살 수 없는 훌륭한 이상들로 점철된 슬픈 이야기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예수를 모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불교도는 부처를 따르는 데 실패했으며, 대부분의 유생들은 공자를 울화통 터지게 했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소비시장주의 이념을 성공적으로 준수하며 살아간다... 이것(자본주의)은 그 신자들이 요청받은 그대로를 실제로 행하는 역사상 최초의 종교다.(유발 하라리 저, 조현욱 역, 2017, 494쪽)
유발 하리리는 명저 『사피엔스』자본주의야말로 인류를 교리에 맞도록 철저하게 순응하게 만든 역사상 최초의 종교라 평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는 경제 체제이지, 종교가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류의 삶을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해 왔다는 점에서, 유발 하라리가 평했던 것처럼 인류 역사상 존재해 왔던 그 어떤 종교보다도 더욱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자본주의라는 교리로 완벽에 가깝게 포섭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현대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위력과 영향력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그것을 합한 것보다도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아 보인다. 당장 종교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사리 찾아볼 수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유리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나 사회집단을 찾아보기란 극도로 어려울 테니까. 자본주의가 경제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로부터 유리됨은 곧 경제적ㆍ사회적 단절과 파탄을 뜻한다. 과거 냉전시대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은 자본주의 체제를 적으로 돌리며 공산주의 세계 건설을 부르짖었지만, 이들 역시 자본주의 경제의 영향력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채 결국에는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편입되고 말았지 않았던가. 대표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은 21세기에도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이어 오고 있지만, 이 두 나라는 역설적이게도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며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하다못해 '자본주의 돼지'를 '때려잡자'라고 외치는 북한조차도, 현실 속에서는 '외화벌이'를 위해 체제 유지를 위해 개성 공단 유치, 해외 북한 음식점 운영, 장마당 등 자본주의 요소를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으로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모순에 저항하는 시민운동과 학술연구도 전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2011년 일어난 대규모 시위인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에서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의 최중심지인 월스트리트를 공간적 무대로 삼아 이루어진 불평등, 양극화, 고용불안과 비정규직 확산 등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가 전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Shrivastava and Ivanova, 2015, pp. 1210-28). 그리고 마르크시즘 연구와 마르크시즘 지리학의 세계적인 거장인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 체제는 불평등, 주기적인 대규모 경제위기, 그리고 환경 파괴라는 모순을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 세계적인 연대를 통해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 오고 있다(데이비드 하비 저, 최병두 외 역, 2009). 자본주의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양대 축인 미국과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한편으로 국력과 달리 교토 의정서나 파리 기후협약 등의 환경 관련 사안에는 매우 소극적인 행보를 보여 왔음()을 감안하면,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절대로 간과하기 어려운 중요성을 가진다.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설령 100%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세계 경제가 가까운 미래에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체제로 완전히 대체되리라고 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자본주의 세계이다. 자본주의는 무역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묶었고,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을 촉발하여 인류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서구 중심의 세계질서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세계적인 불평등을 야기하며 지배-피지배 관계를 공고히 한 측면도 있음을 간과하기도 어렵다. 대학가에서 '운동권'이라는 용어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던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학을 다녔던 필자는, 어느 선배가 '길거리 시위에서는 반미를 외치면서 시위가 끝나자마자 코카콜라를 마시러 가는' 운동권 학생을 성토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미제의 상징'인 코카콜라를 마시러 가는 운동권 학생의 모습은 위선이나 이중성, '내로남불'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사람들의 삶 속에 얼마나 깊고 강력하게 뿌리박고 있는가를 생생히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점에서 환경문제 등으로 인해 인류 사회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의 인류이기에, 자본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성찰은 인류 문명의 지속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풀어야만 할 숙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는 자본주의를 주제로 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먼저 자본주의라는 개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흔히 자본주의를 돈, 사유재산, 시장경제 등과 동일시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옳은 이해가 아니다. 예를 들어 무역이나 사유재산 개념은 이미 고대부터 있어 왔지만, 고대의 실크로드 무역 등을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활동이라고 분류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어떻게, 왜 탄생했고 세계를 '종교적인 수준'으로까지 지배하는 경제 체제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이른바 '보수' 성향의 매체에 기고된 글을 읽어 보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우수성이 공산주의 등의 도전을 물리쳤다는 식의 논의를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유형의 글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근간이라는 논리로도 쉽사리 이어진다. 그런데 설령 그러한 논리가 100%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우수성'만을 목이 쉬도록 역설하기만 해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담보할 수는 없다.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당연히 환경문제나 불평등 등과 같은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 모색을 당연히 기대할 수도 없다. 적지 않은 부작용과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가 자본주의 세계인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을 필자는 나침반과 지도, 그리고 화약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바탕으로 찾아가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본, 즉 돈의 흐름에 토대하는 경제 사조이자 체제이다. 이 같은 돈의 흐름이 소규모 상거래 수준을 넘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로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먼 거리를 뛰어넘는 장거리ㆍ대규모 무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Campling and Colás, 2021). 그리고 생산과 무역을 위한 땅과 교역로, 그리고 원료와 시장의 확보는 수많은 전쟁을 불러왔고, 전쟁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한층 더 공고히 하며 세계를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재편해 왔다. 이러한 점에서 자본주의는 다분히 공간적인 개념인 동시에, 전쟁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아자 가트 저, 오숙은ㆍ이재만 역, 2017).
이 글을 통해 연재를 시작할 프로젝트 『화약과 지도, 나침반이 그려낸 자본주의 세계』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탄생했는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땅과 바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본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어떤 대안을 모색해야 할지에 대한 지구사적인 안목,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의 성찰과 통찰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아자 가트 저, 오숙은ㆍ이재만 역, 2017, 『문명과 전쟁』, 교유서가.
유발 하라리 저, 조현욱 역, 2017, 『사피엔스』, 김영사.
데이비드 하비 저, 최병두ㆍ이상율ㆍ박규택 역, 2009, 『희망의 공간: 세계화, 신체, 유토피아』, 한울.
Campling, L., and Colás, A. 2021. Capitalism and the Sea: The Maritime Factor in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Verso Books.
Shrivastava, P., and Ivanova, O. 2015. Inequality, corporate legitimacy and the Occupy Wall Street movement. Human Relations, 68(7), 1209-1231.